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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Apr 19. 2023

행복을 벌기 위해 행복해지는 것.

돈이 많으려면 일단 돈이 있어야 한다는 당혹스러운 현실처럼.

한여름 같은 봄날의 오후, 편안한 노란 반바지에 주황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집을 나선 나는, 동네 쉼터에 있는 평상처럼 생긴 벤치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곤 그 위에 엎드려 누웠다. 어김없이 볕이 좋았다. 얼음이 적당히 녹기 시작한 버블티를 구겨진 빨대로 빨아 마시며, 오래전에 구입해 놓고는 읽지 못한 채 책장에 방치해 두었던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을 읽기 시작했다. 정신과 의사인 꾸뻬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각양각색의 환자들을 매일같이 만나며 진정한 행복에 닿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행복이 무엇인지, 무엇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는 병원문을 잠시 닫고 세계를 돌아보는 여행을 떠난다. 행복의 호수를 침대 삼아 깔고 누워 유유자적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나로서는 그가 정의할 행복이 무엇인지 딱히 궁금하진 않지만, 여행을 함께 하는 것이 무척 신이 나기에 반드시 완독 할 계획이다.


수년 전의 나는 분명 행복이 뭔지 알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이 책을 충동구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꾸뻬와 함께 속 편하게 두근거리는 여행을 떠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었을 리 없다. 돈이 많으려면 일단 돈이 있어야 한다는 당혹스러운 현실처럼, 진정한 행복에 대해 알아가는 여행을 떠나고 싶으면 일단 나를 힘들게 하는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행복해져야 한다.


무엇을 어찌한들 변함없이 불행하여 어느 순간 불행이 나의 '괜찮은' 상태의 기본값이 되었었다. 불행해도 불행한 걸 몰랐다. 매일 아침 독극물을 한 병 들이키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 같던 시절, 나는 행복해지려고, 혹은 그렇게 보이려고, 무던히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스타그램에서 모두의 일상이 풍요롭고 아름다워 보이듯이, 분명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무척이나 태평하고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다고 믿어버렸다. 불행의 목줄에 단단히 메여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줄이 팽팽히 당겨진 그 끝에서 최대한 고개를 앞으로 뺀 채 혀를 날름거려 보았다. 그 혀에 가까스로 닿는 캐비어를 맛보며 행복이라 여겼다.


악몽이 잦았다. 오해의 바다 위 조각배 두 척이었던 우리가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밝은 달빛이 무색하게 암울한 물안개가 짙게 깔린 밤바다 위에서, 나는 너를 향해 황량한 목소리로 도와달라 외쳤다. 물안개를 지나며 그 푸석한 소리의 끝이 갈라져 단어들을 찢고 적셨다. 나의 의미불명의 언어는 바람을 타고 너에게 몰아쳤고, 그런 만큼 그 반동으로 바다는 우리를 떼어놓았다. 너의 배는 동쪽으로, 나의 배는 서쪽으로. 어떻게 좀 해보라며, 내 말을 좀 들어보라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며, 그렇게 앞다투어 서로에게 목청 좋게 외쳐댈수록, 물살은 점점 더 거칠어졌고 우리는 더욱더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저을 노도 없는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가까워질 도리가 없었다.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좋았던 그날 함께 항해를 시작했더라면 분명 즐거웠을 것이다. 다시 그런 날이 한 번쯤은 와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어리석은 미련이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 미련은 나의 목을 아프게 휘감은 채 불행으로 새겨졌다. 안타깝다. 사랑스럽던 순백의 돛은 더럽혀진지 오래기에, 너는 나를 태울 수 있는 배가 아니었고 나는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 울퉁불퉁한 미소 뒤의 태연자약함이 싫었다. 맑은 겨울 아침 살짝 녹기 시작한 고드름의 끝 같은 눈빛이 불편했다. 그럼에도, 나는 살기 위해 날 죽여야 했던 너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새로운 봄이 찾아올 무렵 나의 기도로 네가 쏘아 올린 화살. 그렇게 나의 배가 침몰했다. 하루하루 버텨내며 노력해서 조금씩 웃음을 되찾고 점진적인 행복을 이룩하는 고지식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로 풀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닷속으로 고꾸라지는 나의 배와 함께 세상은 거꾸로 뒤집혔고, 모든 건 한 번에 붙잡혔다. 나는 그때 그 시절 청춘 드라마 같은 여름밤 한강의 폭죽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행복해진 나는 행복을 벌기 위한, 그리고 행복을 지키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청명한 밤하늘에서 원 없이 빛나다 재가 되어 바다로 떨어지면 다시 한번 심해에 닿을 것이다. 이번에는 분명 더 멋질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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