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죽던 해]
천용성의 첫 번째 앨범
/ ” 김일성이 죽던 해 “
“김일성이 죽던 해인 1994년엔 몇 살이었어요? 여덟 살이요.” “특별히 남는 기억이 있어요? 학습지를 풀다가 눈썹을 모조리 밀었어요. 그 기억이 나요.” 서울이 불바다 위협을 받던 해에 천용성은 눈썹을 밀었고, 천용성의 친구는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했다. 나의 부모는 가정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출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해에 모두는 다른 삶을 살아냈고 어떤 이는 그 해를 살아내지도 않았다. 김일성이 죽던 해라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각자의 일상을 지내고 그 지극한 일상들을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2019년 6월 발매된 ‘천용성’의 첫 번째 앨범 [김일성이 죽던 해]의 이야기다.
Q.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다음 앨범 생각하고 있어요. 작업에 들어간 건 아니고, 시간 나면 “아 앨범 만들어야 하는데.” 생각하며 지내고 있어요.
Q. 예전에는 천용성을 소개할 때, 타칭 음악가라는 말을 쓰셨잖아요. 요즘은 어떻게 소개하세요?
제 17회 한국대중음악상 포크 부문 수상자 천용성입니다. 사실에 기반해 얘기할 수 있는 수식어가 생겼어요.
Q. 수상 소식 듣고 기분이 어땠어요?
덤덤했어요.
Q. 어느 정도 예상을 하셨어요?
예상 못 했죠. 예상했다기보단 주변에서 띄워줬어요. “나 안 될 것 같은데.” 하면 “너 되는 거 아니냐. 너 될 것 같다.” 주변에서 몰아가니까 도리어 덤덤했나 봐요.
Q. [김일성이 죽던 해]는 어떤 앨범인가요?
가끔 들으면 좋은 앨범이에요.
Q. 요즘도 가끔 들으세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듣는 것 같아요. 앨범 전체를 듣는 건 아니고, 어디에 영상이 올라왔다 하면 그 곡을 듣는 정도로요. ‘대설주의보’를 제일 많이 들어요. ‘대설주의보’에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입힌 영상도 봤고, ‘전역을 앞두고’에 군복 입은 사진을 짜깁기한 영상도 봤어요. 그런 식으로, 그렇게 가끔 들어요. 그럴 때면 “이렇게 잘 만들었었어?” “생각보다 괜찮았구나.” 해요.
Q. 천용성이라는 이름 훨씬 전에도 여러 곡을 발표했어요.
처음 곡을 쓴 건 대학가요제 때였고, 2012년부터 경험담이라는 이름으로 곡을 발표했어요.
Q. 당시에 앨범을 발매하다가, 천용성으로 첫 정규앨범이 나오기까지 6년가량 발매 소식이 없었어요. 왜 그랬어요?
앨범을 내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지금 내기엔 수준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그렇다면 그간은 뭐하면서 지내셨어요?
군 복무도 마치고, 녹음실에서 근무도 하고, 대학원도 다니고, 놀기도 하면서 지냈어요.
Q. 단편선 씨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앨범을 준비하게 된 거예요?
단편선 씨를 만나서 시작했다기보단, 작업을 시작하고 싶어서 단편선 씨에게 만나자고 했죠.
Q. 갑작스레 앨범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논문 쓰기는 싫고, 앨범을 내야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Q. 곡은 다 준비되어 있었나 보네요.
네.
Q. 가장 오래전에 만들어둔 곡은 뭐였어요?
‘울면서 빌었지’랑 ‘동물원’이요. 대학교 3학년 때도 있었어요. ‘난 이해할 수 없었네’는 대학교 때 절반, 군대에서 절반 썼던 것 같고 ‘대설주의보는’ 전역하고 나서 만들었어요.
Q. ‘김일성이 죽던 해’는 친구의 이야기에서 시작됐어요. 다른 곡엔 또 어떤 이야기가 얽혀 있어요?
‘울면서 빌었지’는 어릴 때, 엄마아빠가 싸우던 기억이에요. 이후 발매한 노래 중에 ‘사골’이라는 곡이 있는데 ‘울면서 빌었지’의 프리퀄이에요. 엄마아빠가 왜 싸웠는지에 대한 얘기가 나와요. “분당 아파트가 세배 오르는 동안에 너는 무얼 했냐며”라는 구절이 있거든요. ‘울면서 빌었지’의 사연은 그래요.
Q. 김일성이 죽던 해인 1994년엔 몇 살이었어요?
여덟 살이요.
Q. 특별히 남는 기억이 있어요?
어릴 때 공부하던 학습지가 있었어요. 그걸 풀다가 엄마를 봤는데, 눈썹칼로 눈썹을 정리하고 계셨어요. 나도 해봐야겠다 싶어서 안방 화장대로 가서 눈썹을 밀었어요. 그게 아마 그쯤이었을 거예요. 그 기억이 나요.
Q. 어머니는 어떤 곡을 좋아하세요?
‘김일성이 죽던 해’를 싫어해요.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라서, 얼마 전에는 제가 북한에 납치되는 꿈을 꾸셨대요. 같이 사는 친구한테 “어머니, 용성이가 없어서 월세를 못 냈어요. 보증금을 다 까먹었어요. 용성이가 안 보여요.” 전화가 왔대요. 어머니는 ‘김일성이 죽던 해’라는 제목이 아직도 이상하고 어색하대요. ‘울면서 빌었지’와 ‘사골’도 싫어해요. 집안 얘기를 너무 떠벌리고 다닌다고요. 그러고 보니 어떤 곡을 좋아하는지는 여쭤본 적이 없네요.
Q. 앨범 준비하면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어요?
제가 숨이 짧아요. 노래를 부를 때 호흡이 길지 않아요. 한 호흡에 부를 수 없는 구절인데, 한 호흡에 부르고 싶었어요. 저는 녹음을 잘 해서 이어보자, 한 호흡에 부른 것처럼 이어보자 했어요. 반면 단편선 씨는 어차피 라이브도 해야 하니 호흡을 끊어 가자 했어요. 그 결정을 하다가 녹음이 길어졌어요. 결국은 제 방법으로 진행하고, 단편선 씨랑은 누가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서로 취향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어요. 단편선 씨는 라이브와 음반의 통일성을 고려했고, 저는 일단 음반을 듣기 좋게 만들고 싶었고요. 사실 당시만 해도 라이브 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이렇게 라이브를 많이 하게 될 줄 몰랐어요.
Q. 작업하면서 특히 신경 쓴 일은 뭐예요?
커피를 사더라도 스타벅스에서 사고, 피자를 먹더라도 파파존스에서 먹고, 돈이 없어서 얼마 못 주더라도 주기로 한 건 제때 주는, 그런 것들을 신경 썼어요. 저보다도 더 많은 일에 함께해주신 분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돈을 아껴도 큼지막한 데에서 아끼지, 대세에 크게 지장 없는 곳에서까지 아끼고 싶지 않았어요.
Q. 앨범이 발매되고 나선 기분이 어땠어요?
다를 게 없었어요. 당연히 나와야 될 게 나오는 거라 생각했어요. 이 날만 바라보고 근 1년을 작업해온 거잖아요. 안 나오면 황당하겠지만, 당연히 나와야 될 게 나왔구나 싶었어요.
Q. 앨범이 좋은 얘기들을 많이 들었어요. 그게 실감 나기 시작한 건 언제쯤이에요?
사람들이 정말 좋아하는구나 느끼기 시작한 건 수상하고 나서요. 그전까지는 트루먼쇼 같은 거 아니냐, 다 같이 작당해서 천용성 속여보자 한 거 아니냐 의혹이 있었어요. 눈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생기니까 그제야 “진짜 괜찮은가 보구나.” 했어요.
Q. 앨범을 발매한 지도 1년이 넘었어요. 당시와 비교했을 때 달라졌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어요?
그때보다 노래할 때 덜 떨어요. 긴장을 덜 해요. 공연하기 전에 물도 덜 마시고, 화장실도 덜 가요. 그리고 엄마가 기타 사는 데 돈을 보태줬어요. 예전 같으면 안 보태줬을 텐데, 앨범 내고 1년이 지나는 동안 뭔가 보여준 게 있나 봐요.
Q. [김일성이 죽던 해]가 어떤 앨범으로 남으면 좋겠어요?
한 10년 뒤에 “당신 한국 인디를 좋아한다면” 이런 추천곡 리스트가 만들어져요. 메인은 김사월 씨, 권나무 씨고요. 김사월을 듣고 “더 관심 있다면 이 노래도 들어봐라” 했을 때 그때, 더 들어봐라 리스트에 제 앨범이 있으면 좋겠어요.
Q. 10년이라는 기간이 갖는 의미가 있나요?
살아남았다랄까요? 작년에 앨범이 사랑을 받았지만, 아직도 못 미더운 게 있어요. 운이 좋아서, 제목부터 화제성이 있으니까, 분위기에 휩쓸려서 하는 미심쩍음이 있어요. 10년쯤 지나면 이런 것들이 다 빠질 거잖아요. 그때도 괜찮은 앨범으로 여겨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진짜 괜찮은 거 아닐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