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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크라노스 Apr 21. 2020

[BACKSTAGE!] 생기 스튜디오 정주영


<BACKSTAGE!>는 무대 바깥의 이들을 위한 시리즈 인터뷰입니다. 아티스트와 리스너간의 선순환을 도모하고, 나아가 씬의 발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조명할 예정입니다. 조명이 꺼지고, 콘페티가 모두 땅으로 떨어진 다음 날에도 쇼는 계속될 것이니까요.


<BACKSTAGE!>가 만나볼 두 번째 주인공은 생기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정주영 님입니다. 음악 깨나 듣는다는 리스너와 뮤지션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얻기 시작해 어느덧 이제는 마포구 일대를 대표하는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생기 스튜디오’. 밴드 논 (NON)과 밤신사에서 차분하면서도 탄탄한 베이스 연주를 선보이던 그가 와우산로 한가운데에 스튜디오를 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무작정 그를 찾아가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본 인터뷰는 2018년 11월에 이뤄졌습니다)




Q. 대학 동아리에서 음악을 처음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음악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러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밴드를 해보자’는 마음에 자연스럽게 동아리를 찾아가게 됐죠. 그 당시 베이스 파트가 비었다 해서 자연스럽게 베이스 기타로 (음악 활동을) 처음 시작하게 됐어요. 그렇게 취미로 그럭저럭 지내다가 군대도 다녀오고, 놀면서.. 사실 음악을 하겠다고 말만 했지 전 시정잡배였어요. (모두 웃음) 열심히 음악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업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고요.


어릴 때, 소규모아카시아밴드 민홍이 형과 친했어요. 그래서 그 형이 가끔 연주해달라 하면 가서 도와주는 정도로 근근이 음악 활동을 이어왔어요. 그러면서 20대를 그렇게 놀면서 흘려보내고 정말 후회를 많이 했어요. 30대에 접어들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하다 건축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원룸 같은 건물을 시공해서 판매하는 일이죠. 건축 관련 일은 30대 초반부터 약 5년에서 6년 정도 했어요.


언제부턴가 건축 일이 너무 힘들고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제대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죠. 그래서 시작한 밴드가 논(NON)이에요. 본격적으로 그 때부터 음악을 시작했다고 봐야죠.


Q. 어느 인터뷰에서 유학 얘기를 하신 것을 읽었어요. 유학은 언제 다녀오신 걸까요?


20대 말쯤,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소위 도피 유학이라 하죠. (웃음) 통역을 전공했는데, 학교에 다니면서 알바 형식으로 일본 레이블의 일을 잠깐 돕기도 했어요. 한국 뮤지션이 일본에 오면 공연 코디네이터를 한다거나, 반대로 일본 뮤지션들이 한국에 갈 때 관련 일들을 도왔죠.


Q. 여러 소속을 거쳤지만, 음악이라는 인연은 어릴 때부터 계속 이어진 셈이네요.


맞아요.


Q. 덕질하기 참 좋았겠어요. (웃음)


당시 저는 피시만즈나 야마시타 타츠로를 좋아했는데, 제가 일본에 있었을 당시에는 피시만즈나 야마시타 타츠로 모두 보기 힘들었죠. 그래서 그 당시 활동했던 인디 밴드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녔어요. 재즈, 록, 힙합을 좋아했어요. 한국에 내한 오기도 했던 소일 앤 핌프 세션 (SOIL & PIMP SESSIONS)이나 쿠루리(くるり ), 오버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OVERGROUND ACOUSTIC UNDERGROUND) 같은 팀들이 기억에 남네요.  


Q. 밴드 논(NON)으로 본격적인 밴드 활동을 시작했어요. 당시 하시던 건축 일은 다 정리하셨던 걸까요.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둘 다 했죠. (웃음) 그 대신, 공사 일은 이미 익숙했기 때문에 남는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음악 활동을) 했어요. 옛날에는 ‘음악 하겠다’고 말만 앞세웠다면, 30대 중반 되어서는 코드도 외우고 연습도 하고 녹음하는 방법도 공부했죠. 어떻게든 앨범을 내고 싶었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제대로 음악을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Q. 정식 멤버로 활동했던 논(NON)과 밤신사 모두 그 활동이 오래가지는 못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어때요?


과거에는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다면, 이제는 저 자신을 돌이켜보는 경우가 많아요. 나이가 들었나 봐요. (웃음) 예전에는 정말 몰랐거든요.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너희들은 몰라줘’ 약간 이런 입장이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소규모 같은 경우에는 세션이었기 때문에 ‘하자’면 하고, ‘말자’면 멈추는 경우가 많았어요. 제 밴드라는 생각을 크게 가지지 않았죠. 하지만, 논 같은 경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의지대로 만들어진 밴드였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죠. 그러다 보니 힘이 과하게 들어갔던 것 같아요. 1~2년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멤버들이 많이 힘들어했고 밴드를 지속할 수 없었죠.


Q. 그렇다면, 밤신사를 마지막으로 베이시스트로의 활동은 잠시 멈춘 것일까요.


사실 지금 밴드를 하나 하고 있어요. 이름은 ‘바이날로그’ 라고, 퓨전 국악 밴드에요. 친구와의 인연으로 시작하게 됐고, 결성된 지 10년이 넘은 팀인데 저는 한 2년 정도 전에 베이스로 합류하게 됐어요. 국악 씬에서는 굉장히 인정받고 있는 팀이죠. 멤버 친구들이 국악 쪽에서는 거의 문화재 급이라 각자 바빠 최근엔 잘 모이지 못하고 있어요. (웃음)  




Q. 인간 정주영에 대한 몰랐던 이야기를 많이 전해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본격적으로 생기 스튜디오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생기’를 처음 운영하기로 마음먹은 배경이 궁금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요. 일단 첫 번째로는 ‘시스템에 대한 개선’이 필요했어요. 실제로 인디 씬에서 활동을 하면서 시스템적으로 아쉬움을 느낀 적이 많았어요. 공연장 환경부터 페이 문제 등 아직도 시스템 내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많았죠.


그리고, 다양한 인디 음악을 소개하고 싶었어요. 사실 아직도 ‘인디’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두컴컴한 지하실의 느낌을 먼저 얘기해요. 개러지가 좋다 혹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전반적인 인식이 그렇다는 거죠. 하지만, 인디 음악을 조금만 들어봐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그래서, 쾌적한 분위기에 제대로 된 사운드를 표현할 수 있는 특색 있는 공연장을 지상에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됐고 그렇게 생기 스튜디오를 착수했어요. 어렴풋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2~3년 전부터였죠. 시간이나 자본 등 여러 가지 타이밍이 맞아야 일을 진행할 수 있잖아요? 작년 여름부터 베뉴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시작하면서 부동산도 알아보고 자본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죠.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한 건 작년 12월부터였어요.


Q. 지금 당장 떠올려봐도 지상에 위치한 공연장이 잘 떠오르지 않아요. 아무래도 접근성이나 방음 문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생기 스튜디오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요.


어유, 완전 있었죠. (웃음) 사활을 걸고 시작하는 새로운 사업인 만큼 여러 가지 고민이 들었어요. 접근성과 민원 문제를 포함해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종의 모험을 한 셈이죠. 지금의 생기 스튜디오에 처음 왔을 때 느낌이 참 좋았어요. 일단 홍대가 전부 내려다보인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생기 스튜디오 건물이 민가와 한 블럭 정도 떨어져 있어요. 그래서 민원 문제가 많이 일어나지 않겠다 싶었죠. 생기는 원래 가정집으로 쓰던 공간인데, 제가 갔을 때는 이미 철거가 끝나 시멘트 벽이랑 바닥만 있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밑그림을 그리기 수월했어요.


Q. 공사 일을 했던 경력 덕분에 완공까지 사장님이 모두 진행하셨겠네요.


그렇죠. 동료 뮤지션들이랑 같이 망치 들고 공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직접 진행했어요. 한겨울에 참 고생했죠. (웃음) 


Q. ‘생기’라는 이름을 짓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사실 공사를 시작하고 스튜디오가 거의 다 완성될 때까지 이름을 정하지 못했어요. 고민도 많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그런 와중에 ‘(강)택현’이라고 예전에 윈디시티에서 퍼커션도 연주하고 지금은 노선택과 소울소스에서 드럼 치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반농담식으로 ‘생기’, ‘활기’같은 단어를 추천해왔어요. 저는 당시 꽤나 진지했었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좀 짜증 나더라고요. (웃음)


저는 진짜 급하고 진지한데, 얘는 왜 이렇게 막 던지나 싶었죠.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날수록 계속 생기라는 단어가 생각났어요. 왜 제가 처음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나 돌아봤더니, 제가 ‘생기’라는 단어에 선입견을 품고 있더라고요. 인삼이나 산삼이 들어간 건강보조제 아니면 전립선 치료제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모두 웃음) 그런데 사실 아무 생각이 없는 백지상태에서 ‘생기’라는 단어를 떠올려보면 그 의미가 너무 좋거든요. 외국인들에게 동양적인 느낌도 어필할 수 있고, 반대로 한국인에게는 ‘뭐지’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생기’라는 단어가 점점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Q. 말씀하진 ‘뭐지’라는 포인트가 참 중요하죠. (웃음)


그렇죠. 그래서 결국 ‘생기 스튜디오’라는 이름을 짓게 됐는데 처음에는 주변에서 다 말렸어요. “형 진짜로 하실꺼냐고” 주위에서 그러는데. 하하. 정작 이름을 지어진 친구도 이름을 듣고 놀랐다니까요.


Q. 결과론적으로 잘 된 일이 됐어요.


맞아요. 사실 인삼을 로고에 넣어보려 했어요. 처음 제가 생기라는 단어를 들은 느낌 그대로를 가져가고 싶었죠. 그래서 인삼을 팝적으로 로고에 넣고 싶었는데, 여러 작업을 거치면서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못했고 결국 병풍과 산맥, 레코드가 공존하는 지금의 로고가 나오게 됐어요.


Q. 공식적인 첫 오픈은 언제일까요.


3월 3일이에요. 첫 공연도 같은 날 열렸죠. 신세하, 모과, 그리고 이종민과 배드보이와 같이 오픈 이벤트를 열었어요. 포스터도 만들고 제대로 된 공연을 열었는데, 유료 관객이 네 명이었어요. (웃음) 공연장 같이 만든 친구들이랑 밴드 멤버들, 그리고 네 분의 관객과 함께했던 기억이 나요. 


Q. 네 명이라니, 지금의 생기 스튜디오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낯선 숫자네요. (웃음) 그렇게 첫 공연을 마치고, 이제 어느덧 6개월 정도가 흘렀어요. 음악을 다루는 여러 베뉴들와 비교했을 때, 비교적 빨리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자리 잡았다 생각해요. 혹시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을까요?


부끄럽지만, 일단은 주변 친구들과 아티스트분들께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공연장이 지상에 있고, 장비가 좋다는 것이 입소문의 이유가 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공연장도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남의 물건’ 이잖아요. 어쩌면 전혀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주변에서 먼저 알아주고 소문도 내줬기 때문에 지금의 생기 스튜디오가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동료들에게 그 공을 돌리셨는데, 제가 찾은 이유는 조금 달라요. 생기 스튜디오가 다른 장소와 다른 가장 큰 지점은 ‘서브컬처에 대한 서포트’였어요. <Live Jam>이나 <Lazy Sunday>같은 서브컬처 파티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죠. 외부에서 보기에는 굉장히 의미 있는 행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운영자 입장에서는 수익 측면에서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괴롭죠. (모두 웃음) 하지만 무엇보다 제가 좋아하는 일이기에 계속 유지할 수 있어요. 저는 음악을 장르로 분류하는 것은 인간을 피부색으로 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모든 음악이 저마다의 장점과 매력을 갖고 있어요. 생기 스튜디오의 모토가 바로 ‘언더그라운드 뮤직의 전파’에요. 힙합과 락도 언더그라운드 뮤직이 될 수 있고, 국악도 언더그라운드 뮤직이 될 수 있죠. 생기 스튜디오가 ‘음악 전반’을 다루는 베뉴가 되었으면 해요. 아직도 못 다룬 장르들이 꽤 있어요. 그중 하나가 일렉트로닉 모듈라 씬이었는데, 다음 주에 공연을 열게 되었어요. 

주정민 @joojeongmin 


Q. <Lazy Sunday>는 음악과 만화가 결합한 독특한 형태의 기획 공연입니다.


Lazy Sunday의 처음 형태는 음악을 듣는 칠(chill)한 파티였어요. 그런데 사실 아무리 음악을 좋아해도 세네 시간 듣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컨텐츠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고민을 하던 중에, Lazy Sunday 포스터를 제작하는 작가 친구가 음악과 만화를 결합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어요. 그래서 독립 만화를 함께 전시하는 지금과 같은 형태가 만들어졌어요. 아직 더 발전을 시켜야 할 것 같아요. 간단한 핑거 푸드 같은 음식을 같이 제공하면 어떨까 싶은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웃음)


Q.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생기 스튜디오’는 라이브 클럽의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레코딩 스튜디오로서 작동하기도 해요. 실제로 생기 오픈 초기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소파도 볼 수 있었죠. 생기 스튜디오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지향점이 궁금합니다.


(잠시 고민하더니) 펑셔널(Functional)하면서도 컴팩트(Compact)하고, 하이브리드(Hybrid)한 베뉴를 만드는 것이 목표예요. 생기가 가진 여러 가지 기능들이 컴팩트하게 상황에 알맞게 하이브리드 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죠. 그래서 말씀하신 것처럼, 레코딩 스튜디오로 작동할 때는 장소에 소파가 놓이기도 하고, 주말에는 소파를 옮겨 공연도 소화할 수 있고 파티가 열릴 때는 파티 룸으로도 활용할 수 있죠. 생기 스튜디오는 레코딩 스튜디오이면서도 라이브 홀이고, 파티 플레이스이기도 해요. 어느 말도 다 맞는 셈이죠. Functional, Compact, Hybrid 이 세 단어를 잘 조합해서 근사한 소개글을 만들고 싶은데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했어요. (웃음)


Q. 지금 구상 중인 일들이 있다면 한 번 소개해주세요.


그때그때 열리는 기획 공연을 잘 준비하는 것이 저의 첫 번째 스텝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좀 안정을 찾는다면 채널을 하나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저의 두 번째 스텝입니다. KEXP나 NPR과 같은 제대로 된 음악 채널을 열고 싶어요. 한국의 뮤지션들을 소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외국의 다양한 서브컬처 뮤지션들을 융복합시키는 역할을 하는 거죠. 몽골이나 이스라엘의 인디 밴드가 출연하는 것도 아예 실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거에요. 사실 이 두 번째 스텝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고 있어요. 여러 방법에 대해 모색 중입니다. 


Q. 어느덧 마지막 질문입니다. 사장님이 생각하는 ‘생기 넘치는 음악’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생기 넘치는 음악이라, 글쎄요. 저는 노래가 지닌 분위기가 우울하거나 크리피하다고 해서 생기 없는 음악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자신만의 색깔이 가미된 노래들이 진정한 인디 음악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이 아티스트만이 지닌 생기라고 생각해요. 생기라는 단어가 지닌 활기찬 모티프가 반드시 음악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봐요. 아티스트 자신만의 개성을 음악에 잘 녹여냈을 때, 그것이 바로 ‘생기 넘치는 음악’의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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