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모습 생활일기

꾹꾹 눌러쓴 추억이 담긴 녹색 일기장

by 김생강

Never Ending Diary

독서감상문 쓰기, 일기 쓰기, 체험보고서 쓰기, 문제집 풀기 등의 다양한 방학숙제 중 초등학생이 가장 힘들어하는 숙제가 '일기 쓰기'라는 설문결과를 본 적이 있다. 일기는 다른 숙제들과는 달리 매일 써야하는데다 -도무지 끝이 없다- 친구의 것을 베껴쓸 수도 없고, 사실상 매일 비슷한 일상을 보내는 가운데 괜찮아보이는 글감을 찾는 것도 힘들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일기 검사'를 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마저도 더 거르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사실 일기쓰는 걸 꽤 즐겼더랬다. 놀이터에서 얼음땡을 하거나 친구집에 놀러가서 과자를 먹거나 동생들과 인형놀이한 것을 떠올리며 항상 끄트머리에는 [참 재미있었다]로 맺어진 일기장을 보면, 뭐가 그렇게나 재미있었던걸까 하고 웃음이 나온다. 어릴 적에는 상상력이 풍부했던건지 '달콤 설탕 꿀 수박'이라던가 '목코 엑스엑스감기' 등 온갖 것에 해괴한 이름을 붙여 일기장에 쏟아내기도 했다. 상상력만큼 작명 실력이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저학년 때는 색연필과 크레용을 움켜쥐고 그림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형제들과 함께 거실에 엎드려 일기를 쓰고나면 작은 손 가득 얼룩덜룩한 흔적이 남았다. 욕심껏 칠한 색깔들이 번져도 마냥 뿌듯하기만 했다.

어쩜 그렇게도 다들 그림 실력이 비슷비슷한지. 동그란 얼굴 가운데 직선을 그리고 위는 까맣게, 아래는 살구색으로 칠한 뒤 표정을 그리면 사람 얼굴이 완성된다. 여자라면 뒤통수에 말꼬리같은 걸 달아준다. 비율따위 신경쓰지 않고 어른이면 크게, 아이면 작게 그린다. 굉장히 단순한 그림인데도 잔뜩 힘을 주어 뭉쳐진 색깔만 보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새모습 생활일기

더이상 일기에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던 건 [새모습 생활일기]를 쓰면서부터다. 한자노트, 영어노트, 음악노트처럼 일정한 형식을 갖춘 일기노트다. 96년도 이전까지 사용했던 '국민학교'라는 용어가 쓰인 노트에는 다소 예스러운 글씨체로 '새모습생활일기'라는 동그라미가 표지에 그려져있다. 초등학교로 리뉴얼된 노트는 이전보다 더 밝은 연두색 계열이 많으며, 정중앙의 무궁화 문양이 특징이다.



천편일률적인 [새모습 생활일기]는 쨍한 연두색부터 어두운 녹색까지 다양한 초록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표지가 유일한 개성이다. 표지를 열어보면 상단에는 날짜와 날씨란이 있고, 좌측에는 생활내용이 근면 / 책임 / 협동자주 / 준법의 카테고리로 체크리스트화되어 있다. 지금 보니 25가지 항목이 넘어가는 게 약간 인성검사같은 느낌이다. 그 아래로는 좋은 일기의 요건에 대해 간략하게 적혀있다. 우측은 주제를 적은 후 일기내용을 쓸 수 있도록 12칸*16줄의 원고지가 희미하게 인쇄되었다. 그 밑은 일종의 피드백 칸이다. '가정통신 및 적어두기'란으로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몇 마디 적을 수 있도록 했다.


어릴적 쓰던 일기장을 펼쳐보니 글씨가 원고지 한 칸 한 칸을 비집고 나올 것처럼 큼지막하고 삐뚤빼뚤하다. 같은 글자라도 같은 모양인 건 하나도 없고 온통 힘을 주어 흑연이 번져있다. 부모님의 피드백으로 '글씨를 잘 써라'라는 내용이 많은 걸 보면 아무래도 내 손의 소근육은 늦게 발달한 모양이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확실히 글씨가 더 정갈해지고 작아진다. 우습게도, 나이가 들면서 큰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게 더 어려워졌다.


인형, 꾸중, 놀이, 과일, 가족, 만화, 산, 친구, 병원 등 주제도 무척 다양하다. 그날 있었던 일 80-90%에 내 느낌이나 생각을 10-20% 정도 덧붙이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이 비율이 반전한다. 세상에 호기심이 많아 외적으로 마구 시선을 보내던 어릴 때와 달리, 내 감정과 생각이 어떠하며 내가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는 사춘기의 감성이 여기서 드러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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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아이들 -내 오빠와 동생들을 포함하여- 이 싫어하는 일기를 성실하게 쓰던 내게, 아버지는 여기에 써보라며 하드커버의 두툼한 노트를 선물해주셨다. 내 기억으로는 5학년 때 처음 하드커버노트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후로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일기를 다 쓸 때마다 계속해서 선물로 받았다. 다른 애들이 똑같이 녹색 일기장을 쓸 때 혼자 특별한 일기장을 쓰고 있다는 게 좋아서 더 열심히 썼다. 네모난 원고지칸에서 벗어나 다시 종종 그림을 그렸고, 바다에서 주운 얇은 조개껍데기와 마트에서 사용한 영수증, 오리털 잠바에서 빠져나온 깃털 등을 붙여가며 좀 더 풍성하게 일기장을 꾸몄다. 내 생애 가장 열심히 일기를 썼던 2년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일기 검사도 없었고 해야할 공부의 양이 급격하게 많아져 일기쓰기가 시들해졌다. 5-6학년 때 썼던 일기가 두툼한 노트 서너권이라면 중학교 3년동안 쓴 일기가 한 권 정도일까.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더욱 빈도가 낮아져 반 권을 겨우 채웠다. 뒤로 갈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얼룩져있어 차라리 양이 적은 게 다행일 정도다. 성인이 되어서는 일기를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책에서 읽은 좋은 글귀나 영화의 대사, 마음에 와닿는 노랫말을 수첩에 적는 작은 습관이 생겼다.



집 한 켠 사과상자 안에는 우리집 4남매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썼던 일기장들이 차곡차곡 모여있다. 대청소를 하거나 이삿짐을 싸면서 한번씩 열어보는데, 그 수많은 일기장들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펼쳐서 읽곤 한다. 이런 일도 있었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하고 웃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분명 나였는데 지금의 나같지 않은 어린 나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호기심도 꿈도 많았던 작은 아이를 찾아 다시 한 번 녹색 흔적을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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