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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대학교병원 Aug 29. 2022

한국 의학의 선구자, 윤일선

김상태(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윤일선(1960년경)


김성진 교수의 '윤일선론'

1930년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제1회) 외과의사가 된 김성진(1905~1991). 그는 해방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교수, 학장, 동창회장을 역임한 의료계의 거목이었고, 1960년 이후 보건사회부 장관, 공화당 원내총무 등을 역임하며 정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런 김성진이 1958년 파격적인 일을 벌였다. 월간지 『사조(思潮)』에 '윤일선론(尹日善論)'을 기고한 것이다. 한 인물의 삶과 인품을 공개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금기시되는 일 중 하나다. 더군다나 김성진이 '해부'한 대상은 다름 아닌 윤일선(1896~1987). 의과대학 시절의 스승이자 한국 기초의학의 '대부'였다. 1958년 당시만 해도 윤일선은 서울대학교 총장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성진은 윤일선을 날날이 묘사하고 냉철하게 평가했다. 그럴 만큼 윤일선을 잘 알고 있었다. 윤일선의 성격과 습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은 대단히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윤박사의 일과는 시계와 같이 정확하다. 규칙적이고 전형적인 그의 사생활은 스케줄 그대로 정리, 진행되었지 예외도 탈선도 없다. 아마 나를 보고 윤박사의 일기를 쓰라 하더라도 별로 틀림없이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윤박사의 허세가 결코 단순하거나 평범한 것도 아니다. 높은 지성과 깊은 모럴을 유지하고 자기 취미도 살리며, 위트도 있고 정서적이며 휴머니티가 흐르는 실로 다채로운 생애를 보내고 있다. (중략)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할 만한 절친한 친구가 없으며,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한 사람의 적도 없다. 필요한 일은 모조리 실행하고, 불필요한 일은 하나도 아니한다. 이것이 윤박사의 모토이며, 철저히 실천하고 있는 All or None Law주의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일기예보는 틀리기 쉬울지언정 윤박사의 이 신조와 처세술은 아마 영구히 변치 않을 것이다.

(김성진, 「윤일선론」『思潮』 1958년 7월호)

(김성진, 『덤으로 산다』, 을유문화사, 1965에 재수록)


윤일선(왼쪽 끝)과 윤보선(왼쪽에서 세번째)(청와대에서, 1960)



병리학자의 길

윤일선은 1896년 10월 5일 일본 도쿄에서 개화운동가 윤치오(1869~1950)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었으며 애국가 작사자로 추정되는 윤치호(1865~1945)의 5촌 조카, 4.19혁명 직후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윤보선(1897~1990)의 4촌 형이기도 하다.

윤일선(1930년경)

어려서부터 허약 체질인 데다가 모친을 일찍 병마에 빼앗긴 윤일선은 자연스레 의학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당시 우리나라에 의사가 희소했던 점에 주목하여 일본의 명문인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교토제대의 전통적인 자유주의 학풍은 물론 당대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일본에서 정치·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나타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경향)'의 기운과 기독교사회주의 등을 폭넓게 수용하여 인문학적 소양과 철학적 면모를 다졌다. 1923년 교토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후에는 병리학교실에 들어가 후지나미 교수를 사사했다. 후지나미는 '근대 병리학의 아버지'인 루돌프 칼 비르효(Virchow, 1821~1902)의 제자로서 일본 병리학의 중심인물이었다. 윤일선이 그에게 받은 첫 연구과제는 '임상진단과 병리해부학적 진단의 대비'였다. 윤일선은 이 주제를 소화하면서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연구의 매력을 실감했다.


1926년 경성제대 의학부 창설 당시에는 병리학교실 조수가 되었다. 과민증('아나필락시스')과 내분비, 특히 호르몬과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연구에 주력해 『일본병리학회지』, 『일본미생물학병리학잡지』, The China Medical Journal 등의 국제학술지에 연구논문을 잇달아 발표했고, 1929년에는 「호르몬과 아나필락시의 관계」라는 논문으로 교토제대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여섯 번째 의학박사였다. 1928년 3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병리학교실 조교수가 되었다. 교수임용, 학생선발, 학사운영 등 모든 면에서 민족 차별이 일상적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임용 이후가 문제였다. 일본인들의 민족차별로 인해 강의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1년 남짓 지난 1929년 4월에는 교수임용 때만큼이나 파격적으로 경성제대에서 추방되었다. 총독부 고위 당국자들은 경성제대에 한국인 교수를 가급적 많이 임용할 것이라고 공언해왔는데, 모두가 거짓말이었다. 그 후 경성제대에서 더 이상 한국인 교수는 없었다. 윤일선은 경성제대에서 전무후무한 한국인 교수로 남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국 기초의학의 핵심인물

1929년 경성제대 사직 후 윤일선은 세브란스의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세브란스의전은 임상의학에 비해 기초의학이 약했는데, 그가 병리학교실 주임교수가 되어 병리학은 물론 기초의학 전반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윤일선은 우선 세브란스의전에 제대로 된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간부진을 설득하여 중앙도서관을 만들고 초대 책임자가 되었다. 이어서 교실마다 연구실제도를 도입했다. 특히 그의 병리학교실은 3년간 총 9천 달러의 연구비를 받아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윤일선과 이영춘(동아일보 1935.6.19.)


그러던 1935년, 한국 의학계에 경사가 생겼다. 사상 최초로 한국인 교수의 지도를 받은 한국인 의학박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 주인공은 윤일선과 제자 이영춘(1903~1980)이었다. 이영춘은 1933년 세브란스의전 병리학교실에 들어가 윤일선 지도교수 아래에서 연구에 몰두하여 1935년 6월 교토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토제대는 윤일선의 모교였다. 세브란스의전 출신으로 교토제대 의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29명으로서, 세브란스의전 출신 전체 박사학위 취득자의 절반이나 되었다. 즉 윤일선은 박사논문 지도를 통한 학문 재생산의 중심에 서 있었던것이다.


윤일선은 한국인 의학단체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1930년 2월 이비인후과학계의 원로 박계양, 경성제대 의학부 생리학 강사 이갑수,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주임교수 백인제 등과 함께 조선의사협회를 창립했다. 특히 기관지 『조선의보(朝鮮醫報)』의 편집책임을 맡아 한국인 의학자들의 학술논문을 수록하고 그들의 근황을 소개했다.


윤일선(세브란스의전 병리학 강의중, 1940년경)



대한민국 암 연구의 선구자

1943년 토끼의 위에 암종을 만드는 데 성공하여 일본 병리학회에 발표한 적이 있던 윤일선은 해방 후 암 연구를 본격화했다. 1947~1949년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열린 국제암연구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949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저명한 학술지인『Cancer Research』에 '한국인 종양의 통계적 조사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던 1950년 3월, 주요 언론들은 윤일선의 암 연구성과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그 중 동아일보의 기사 내용을 살펴보자.




윤 박사는 세계 암학계에서 가장 곤란한 실험으로 되어온 『실험적 간암 형성에 미치는 비장의 영향』 기타 3종목에 관한 연구를 특수한 방법에 의하여 제자인 송요섭 군으로 하여금 이를 시행하여 오던 바 드디어 최근에 이러르 완전한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 동 실험에 있어서 사용된 마우스는 약 3백 마리나 된다 하며, 도합 40만 원의 경비가 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는 7월경 파리에서 개최되는 제5회 국제암학회 총회에 이를 발표하기로 되어 방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윤일선 박사 소감

『이번 우리들의 연구는 아직 세계에서 성공치 못한 것이며 우리의 손으로 처음 완성을 본 것이다. 이미 주논문은 파리로 발송하였는데, 이것이 앞으로 세계 암 연구 내지 암 치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며 더욱 연구에 정진하겠다. 그리고 이번 연구에 있어서 송요섭 군의 헌신적인 눈물겨운 조력과 흥한재단 후원에 대하여 충심으로 감사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동아일보』1950.3.2.1)


윤일선(서울대학교 총장 재임중, 1950년대 후반)


1958년 11월 윤일선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진병호, 이제구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민광식 교수 등과 함께 대한암연구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대한암연구회는 암 연구활동을 본격화하면서 대한민국에 암을 화두로 던졌다. 1974년 3월 대한암연구회는 대한암학회로 거듭났다. 이때도 윤일선이 회장을 맡았으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이제구, 함의근, 김진복 교수 등과 함께 암 연구의 체계화, 보편화에 힘썼다.


윤일선은 1950년대 한국의 대학교육 및 학계의 상징적 인물이기도 했다. 1956년 서울대학교 제6대 총장으로 선출되어 5년 3개월 동안 최장수 총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당시 서울대학교에서는 미국 정부의 한국 대학교육 원조 프로그램인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원활하게 수행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윤일선 총장의 지도력이었다. 또한 윤일선은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이 창립되었을 때 회장을 맡아 우리나라 지성계의 상징적 인물로 활약했다.


윤일선, 그는 학식과 인격을 갖춘 선각자로서 천생 의학자였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제대 의학부 조교수, 세브란스의전 교수, 『조선의보』 편집 책임자를 역임하며 병리학을 비롯한 기초의학 전반의 기틀을 마련한 의학의 선구자였다. 과민증과 암 연구를 선도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한, 의학계의 스승이었다. 1950년대에는 서울대학교 총장과 학술원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지성을 대표했다. 그는 과거에도, 오늘도, 앞으로도 한국 의학의 정신적 지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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