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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대학교병원 Sep 20. 2022

한국 최초의 여성의사

글·사진  김상태(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여성의사 부재 시대

조선시대에는 누가 여성 환자를 진료했을까?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불문율이 존재하던 시절인 만큼 남성 의원이 여성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 초기부터 조정에서는 관기(官妓) 중에서 똑똑한 여성을 뽑아 의료인으로 양성했다. 흔히 의녀(醫女)라고 불렸다. 2003년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한 TV 드라마의 주인공 대장금은 실존 인물로서 16세기 중종 때 이름이 높았던 의녀였다.


조선시대 의녀의 주된 활동은 의료활동이었다. 궁과 양반 가문의 여성을 진맥하고, 침을 놓고, 약을 조제하고, 출산을 도왔다. 환자 간호나 국왕의 수발을 드는 일도 맡았다. 범죄사건의 여성 피의자를 전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각종 연회에 불려가 취흥을 돋우는 기생 노릇도 해야 할 만큼 사회적 지위는 낮았다.


사진 1. 보구녀관(한국 최초 여성 전문병원, 1890년경 모습)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고종과 조선 정부는 의료 근대화를 추진했고, 1885년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이때 진료를 맡았던 의료선교사 알렌(H. N. Allen)의 최대 고민도 여성 환자 진료였다. 남성의사, 그것도 서양인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진찰을 완강히 거부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그래서 제중원에 여성 의료선교사들이 부임했다. 미국감리회는 여성 환자 전문병원인 보구녀관(保救女館)을 설립하고 여성 의료선교사에게 진료를 맡겼다(사진 1. 보구녀관). 그러나 전국의 1천만 여성들에게 극소수의 서양인 여성의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언어소통도 잘 되고, 우리나라의 의료 사정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관습을 잘 아는 한국인 여성의사가 절실했다.



미국 유학 출신의 한국 최초 여성의사, 박에스터

19세기 후반 서울의 한 서민 가정에 김점동이라는 소녀가 있었다. 1876년에 태어나 이화학당에 다녔는데 특히 영어를 잘했다. 보구녀관에서 영어를 통역하며 약을 짓고, 환자들을 간호했다. 어느 날 여성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의 언청이 수술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1893년 감리교 신자인 박유산과 결혼했는데, 세례명이 에스터(Esther)였던 그녀는 이때부터 남편 성을 따라 박에스터라 불렸다.


1895년 박에스터는 로제타 셔우드 홀의 주선으로 미국에 건너가 의학을 공부했다. 1900년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지금의 존스 홉킨스대학)을 졸업했는데, 한국 여성 최초로 의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박에스터는 비운도 겪었다. 아내를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해 온 남편이 그녀가 졸업하기 3주 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진 2. 박에스터, 박유산 부부(1893)


박에스터는 귀국 후 서울의 보구녀관과 평양의 광혜여원(廣惠女院) 등 여성 전문병원에서 진료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안도, 황해도 등 무의촌 지역의 순회진료도 열심히 다녔다. 로제타 셔우드 홀이 설립한 맹아학교 일도 도왔다. 그러나 박에스터는 과로 끝에 1910년 35세에 남편과 똑같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최초 여성의사 박에스터의 삶은 한마디로 '레전드' 그 자체였다.



일본 유학 출신의 최초 여성의사, 허영숙

일제강점기 중등학교 이상의 교육기관 중에 남녀공학인 학교는 없었다. 의학교육기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관립인 경성의학전문학교, 사립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모두 여학생의 입학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여학생이 의사가 되고 싶을 때는 일본, 중국, 미국 등지로 유학해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해야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사회문화적 통념상 여학생의 해외 유학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1897년 서울의 부유한 상인 집에 막내딸이 태어났다. 이름은 허영숙.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야무졌다. 진명여학교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의학을 공부했다. 1918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의사검정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일본 유학 출신 최초로 여성의사가 되었다. 1920년 5월 서울 서대문에 산부인과 및 소아과 전문병원인 '영혜병원'을 개원했다. 한국 여성 최초로 개인병원을 개원한 것이다.


그 무렵 허영숙은 신문 기고를 통해 계몽운동에도 나섰는데, 1920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에 화류병(花柳病, 성병)에 걸린 사람은 국가가 법으로 정해 결혼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주장이어서 찬반양론이 거셌다.


사진 3. 이광수, 허영숙 부부(1920년대 후반)


그러나 세간의 기대와는 달리 의사로서 허영숙의 행보는 소극적으로 변화했다. 병약한 남편의 간병과 내조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문학가이자 언론인이자 지식인이었던 이광수. 1917~1921년 도쿄, 서울, 상하이를 오가며 있었던 그들의 로맨스와 결혼은 당대를 뒤흔든 하나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광수가 곧 병고에 시달리게 되자 허영숙은 남편의 주치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1925년 12월 동아일보 학예부장을 맡아 신문기자로 변신하면서 가장 역할까지 도맡았다. 결국 허영숙은 '신여성'에서 '현모양처'로 변모하면서 의사로서의 활동도 미미해지고 말았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국내 최초 여성의사, 김영흥·김래지·안수경

일제강점기 서울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경성의학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 세 곳의 의학교육기관이 있었다. 지방에는 평양의학전문학교, 대구의학전문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들은 모두 남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다. 여학생들이 국내에서 정규 의학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가 개교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1910년대에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1918년 세 명의 여학생이 '금녀(禁女)의 학교'인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최초 '국내파' 여성의사가 된 것이다. 우선 당시 신문기사 내용을 살펴보자.


"경성의학전문학교라던지 그 전신(前身) 의학강습소에는 본래 여자 생도에게 수업하는 규정이 없는 고로 다만 청강생으로 강연 듣기를 허락하였을 뿐이나 세 규수는 남자와 똑같이 배우며 성적이 극히 양호하여 4개년 동안 수업한 결과가 본과생 남자보다 조금도 못하지 아니한 고로 졸업예식에는 남자 본과생과 같은 졸업자격을 주고 무시험으로 의사 될 자격까지 얻었음은 매우 희한한 일이다." (매일신보 1918.4.3.)


사진 4. 앞줄 왼쪽부터 김해지, 김영흥, 안수경, 뒷줄 왼쪽은 로제타 셔우드 홀(1918)


여기서 '세 규수'는 김영흥, 김해지, 안수경을 일컫는다(사진 4. 김해지, 김영흥, 안수경). 그녀들은 로제타 셔우드 홀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의 추천을 받아 1914년에 청강생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에 입학했다. 정규 입학한 남학생들과 똑같이 4년 동안 의학을 공부하고 1918년 졸업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사진 5. 관보의 졸업생 명단). 경성의전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일이었다. 당시 경성의전 학생들은 졸업만 하면 의사시험을 치르지 않고 곧바로 의사면허증을 교부받았는데,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김영흥, 김해지, 안수경은 국내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여성의사였다.


사진 5. 세 여학생의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기사(조선총독부관보 1918.4.1.)


김영흥은 평양 출신으로 1918년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 곧바로 서울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여성 환자들을 진료했다. 1920년대에 평양과 인천에서 개원했고, 위생 강연회의 연사로도 활약했다. 1920년 평양에서 항일 비밀결사와 관련을 맺었고, 1922년 중국 베이징 동양의사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김해지 역시 평양 출신으로 1918년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 1921년 평양 광혜여원, 1923년 평양 기홀병원에서 의사로 일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1926년은 악몽 같은 한 해였다. 의사 남편인 안창덕이 전염병 환자들을 진료하다가 전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어서 본인은 임산부를 암환자로 오진하여 개복수술을 하는 의료사고를 일으켰다. 1927년 심기일전하여 인천으로 이주했는데, 개인병원을 차린 것으로 추측된다. 1929년 항일 여성단체인 근우회 인천지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세 명 가운데 의사로서 가장 크게 활약한 사람은 안수경이었다. 서울 출신으로 아버지는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한시(漢詩) 평론가로 이름이 높았던 안왕거였다. 오빠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의사에서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유명한 이론가로 변신한 안광천이었다. 1918년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 곧바로 로제타 셔우드 홀이 있던 동대문부인병원에 부임해서 산부인과, 소아과 환자들을 진료했다. 당시 한 신문은 안수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제로부터 7년 전에 아직 조선에서는 여자가 의원이 된다면 모두 다 코웃음을 하던 때요. 무슨 큰 변이나 생기는 줄 알고 쫓아가며 말리던 그때에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벌써 7년 동안이나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산부인과를 맡아서 보는 것이다. 하루에도 30여 명씩이나 들어오는 환자, 난산이 되어 애쓰는 부인들과 잉태치 못하는 그 불행한 여사들에게 더할 수 없는 은인이 되는 것이요. 특별히 그는 돈 없어 고생하는 무료 환자들에게 가장 정답고 친절하게 위안을 주는 것이다. (중략) 그는 성질이 침착하고 면밀하며 자애심이 많고 게다가 너무 지나치게 겸손하여 불쌍한 사람들을 눈물로 대하고..." (조선일보 1924.11.28.)


안수경은 동대문부인병원에서 만 24년 동안 근무했다. 미국인 여성의사들의 인정을 받아 병원장도 역임했다. 한마디로 동대문부인병원의 산 증인이었다. 안수경은 1925년 미국감리회에서 재정긴축을 위해 동대문부인병원을 세브란스병원과 합병하기로 하자 여성의사와 여성계 인사들을 결집해 반대운동을 벌여 성공했다. 김탁원, 길정희 부부의 여성의사 양성 노력에도 동참했다. 그러다가 1942년경 서울 관훈동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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