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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Sep 16. 2015

매일의 포도알

아주 작고 시시한 시작

싸이월드의 방명록과 일촌평 서비스가 종료된다고 합니다. 건조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하는 뉴스 기사를 읽는데 마음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의 전화를 받은 기분이었거든요. 여보세요, 하는 인사에서부터 미안해지는 그런 전화. 어쩐지 마음 한 켠이 계속해서 미안하고 또 미안해지는 그런 전화 말이에요.

서둘러 미니홈피에 접속했습니다. 어느새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면서, 그때의 추억과 다시금 마주했습니다. 카카오톡보다는 문자가, 페이스북보다는 다이어리가, 트위터보다는 일촌평과 방명록이 익숙했던  그때의 기억들을 천천히 돌아보았습니다.


그때는 말이죠, 다이어리에 일기를 쓰면 '포도알'이라는 것을 주곤 했습니다. 바로 그 포도알을 사용해서 귀여운 스티커나 미니미의 옷, 예쁜 폰트 같은 것들을 살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주 사소하거나 시시한 일들도 무조건 일기로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한 줄의 일기에도 포도알은 주어졌거든요. 그렇게 저의 일기는 포도알들이 되었습니다. 아주 작고 시시한 이야기들, 줄기에서 덩그러니 홀로 떨어진 포도알을 닮은 이야기들.



시간이 흐르고, 저의 일기장은 자꾸만 바뀌었습니다. 다이어리에서 트위터로, 트위터에서 페이스북으로,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인스타그램에서 블로그로. 저의 포도알은 여전히 작고 시시했지만, 심지어 감정의 바닥을 보이는 (덜 익은) 포도알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신기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 포도알들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예요. 고단한 일상을 공유했을 뿐인데, 고맙다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저 나의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함께 고개를 끄덕여주는 누군가가 생겼습니다. 때로는 대단치도 않은 것들이 큰 위로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죠.


사실 그렇거든요. 속이 몹시 상할 때, 내가 가진 모든 문제들을 '보편적인 일'로 생각해버리면 이상하게 마음이 좀 편해집니다. 나는 특별해, 하는 믿음을 놓을 때 비로소 좀 편안해지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죠. 학업의 실패도, 끊어진 인연도, 막막한 미래도 결국 누구나 다 경험하는 '보통의'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생각해보는 거예요. 당장은 너무 힘들어서 털썩 주저앉고 싶어도,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세상은 나한테만 차가워' 하면서 흐느끼고 싶어도, 다시 한 번 가만히 생각해보는 거죠. 내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구나. 그건 결국 누구나 경험하는 '흔한' 일이구나. 그러니 이제 그만 툭 털고 일어나도 괜찮겠구나. 누군가의 평범한 일기장을 펼쳐보면서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예요.





한 시인은 새싹을 보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겨울을 견딘 씨앗이 / 한 줌 햇볕을 빌려서 눈을 떴다 / 아주 작고 시시한 시작/ 병아리가 밟고 지나도 뭉개질 것 같은 / 입김에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 / 도대체 훗날을 기다려/ 꽃이나 열매를 볼 것 같지 않은/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고/ 어떤 꽃이 필지 짐작도 가지 않는/ 아주 약하고 부드러운 시작


오늘, 새로운 일기장을 펼쳤습니다. 민망하리만큼 작고 시시한 시작입니다. 입김에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 여린 이야기들, 이름이 뭔지도 의문스러운 기록들이지만 일단은 시작을 해 봅니다. 그럼에도 언젠가 작은 씨앗이 햇볕을 빌려 눈을 뜨게 된다면, 그건 모두 시시한 기록을 함께 읽어 누군가의 덕겁니다. 


시작을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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