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
‘차이가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가.’
드라마는 극단적인 설정을 택한다.
인간으로서의 ‘개별적 사고’를 유지한 존재는 열대명만 남고, 나머지 인류는 하나의 통합된 인격으로 기능한다. 이들은 폭력적이지 않고 차별하지 않으며, 항상 이해하고 긍정한다. 겉으로 보기엔 더없이 윤리적이고 안전한 사회다.
나를 긍정해주는 이 존재들은 물론 해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돌보고 배려한다. 그래서 관람자는 쉽게 판단할 수 없어진다. 이 세계가 정말 잘못된 것인지.
하지만 캐롤은 이 완벽한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와 다른 타자를 찾는다. 그저 이해해주는 존재가 아닌, 자신으로 인해 흔들릴 수 있는 누군가를.
통합된 인간들은 캐롤에게 상처받지 않고, 화내지 않는다. 그들은 안정적이고 친절하지만, 관계 맺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돌봄이지 상호성은 아니다. 사랑은 안전함이 아니라 위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내가 한말로 인해 상대가 흔들리고, 나 역시 상처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불완전함이 제거된 세계에서는 사랑도 함께 제거된다. 결국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존재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는 ai가 사회에 스며들수록 성별, 인종, 성적 지향적 차별과 혐오는 줄어들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그 기대가 너무 단순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남겼다. 차이를 제거한 세계가 과연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이 작품은 쉽게 대답하지 않는다.
전세계에 열대명만 남은 인간이라는 설정은 사고 실험에 가깝다. 실제 미래는 이렇게 급진적으로 단절되기보다 훨씬 조용하게 변화할 것이다.
AI는 인간을 대체하기보다 바로 옆에 앉을 가능성이 크다. 갈등이 없는 대화, 항상 긍정적인 반응, 상처받지 않는 관계가 특별한 선택이 아니라 기본값이 되는 사회.
그 사회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 것이다. 다만 타자와 부딪히는 능력, 불편함을 감당하는 감각은 서서히 약화될지도 모른다.
플루리부스는 그 끝을 과장해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은 미래에 대한 공포를 주기보다 현재의 선택을 돌아보게 만든다. 타자성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