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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E 포 Dec 30. 2022

베스트셀러작가가 내글에 댓글을 남겼다.

MZ직장인의 미니멀라이프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겐 누구나 마음 속 1위 미니멀리즘 책이 있을 것이다.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 

다양한 책들이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성찰을 담고있다. 나의 미니멀라이프는 박혜윤 작가의 책 '숲속의 자본주의자'와 함께 시작했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극단적인 절제보다는 사회와 타협하는 적당한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고 싶었기에 '숲'과 '자본'이라는 단어가 조합된 책의 제목은 본능적으로 동질감을 불러일으켰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내 글에 댓글을 달다.

책을 통해 느낀 것들을 앞뒤도 맞지 않는 비문들로 줄줄 적은 독후감에 저자가 댓글을 달았다. 이런 누추한 글에 방문할 것이라고는 정말이지 생각도 못했다. 내 마음속의 대화가 실제 두 사람 사이의 대화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책을 쓴 박혜윤입니다. 책에서 만나는 대화에서 재미를 발견하신 이야기 너무 좋네요. 월든, 저도 20대 처음에 읽을 때는 뭐 이딴 희한한 소리가 다 있지 하고 어이가 없는 감정이 더 컸는데, 시간이 가면서 다른 대화가 가능해지는 거 같아요.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가의 댓글 (2021.8.1.)-

'월든’을 시도하다 포기했다는 말에 , 본인의 20대 시절을 빗대어 공감을 해주었다. 그 이후 '쉽게 읽는 월든' 이라는 책으로도 도전해보았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가 월든을 인용하듯 나는 '숲속의 자본주의자'와 '도시인의 월든'을 인용한다. 월든이 구교에 비유한다면, 나에게 그녀의 글은 현대에 맞춰 쉽게 해독된 신교이다.


작가의 '너무 좋네요'라는 감상평이 지금까지 내가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면 그녀는 부담스러워할까. 하지만 사실이다. ‘나 꽤 글쓰기가 진심이었던걸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내가 받은 짧은 화답에 심장을 쿵쾅거렸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외계인처럼 생각했던 책 속의 저자가 나의 글을 읽었다는 사실은 '이게 현실이 맞는가' 의심할 정도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주는 작은 관심이 그 사람을 계속 나아가게 한다.' 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느끼게 되었다. 


회피해오던 '포기'를 하다.

당시 나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직공부의 굴레에 빠져있었다. 매일 퇴근 후 책상에 앉아 공기업 NCS필기공부와 전공공부를 했다. 그런데 사실 자신이 없었다. 이런 저런 방법을 써도 NCS점수는 기여코 80점을 넘기지 못했다. 공부를 하나도 안하고 전날 술먹고 시험장에 들어가도 NCS는 합격이라는 다른 지원자의 말을 들을 땐 상처받지 않은 척 다시 묵묵히 책상에 앉았지만, 결과에 대한 확신은 야금야금 줄어들었다.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자 전공공부에도 매너리즘에 빠졌다. '유명한 공기업에 들어가지 않으면 하류인생'이라는 계급사회적 가치관은 날이 갈수록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도전만큼 포기도 힘들다는 말을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하며 살아왔다. 길을 틀어서 간적은 있으나 실패, 포기라는 감정을 느낀 적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숲속의 자본주의자 중 아래 구절들을 보며 나는 포기라는 알을 깨는 시도를 하게됐다.

왜 이런 아픔을 감수하며 포기해야할까? 바로 이 질문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포기의 때를 놓치지 않기위해서다. 과거에는 충분히 좋았던 것들을 놓아야만 하는 때가 온다. 정확히 그때가 언제인지는 각자가 결정해야 한다. 다만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가?라고 자문해보아도, 도무지 떠오르는 답이 없다면 그때가 의심하기에 좋은 때다. 그 의심이 나를 찾아온 순간 회피하지 않는 것, 나에게 태연하고 냉정하게 질문을 던지는 것. 그정도만으로 충분하다. 질문은 단순할수록 좋다

절망하지 마라. 네가 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도 절망하지 마라.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순간, 결국 새로운 힘이 너를 채울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네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숲속의 자본주의자

이 구절은 나라는 독자를 정해놓고 말하는 것 처럼, 내 마음속에 콕 박혔다. 무엇을 위해 자는 시간 외에는 일과 공부만 하며 살고있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도 답을 내놓지 못했다. 답해야 하는 순간들을 수없이 회피했다. 이직 포기는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왔던 내 안의 피라미드식 경쟁 세계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직업의식의 두 얼굴

그리고 나는 직장동료들에 대한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옹졸한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있었다. 정직하게 일해야 한다는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자아에 빠져있었다. 나에 대한 기준이 높은 것 처럼 동료에게 바라는 기대치도 높았다. 순전히 내가 판단했을 때 열심히 하지 않는 동료가 있으면 상사든, 부하직원이든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더욱 고립되어 가고 직장 내 인간관계는 좁아져만 갔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사명감 아래 선과 악을 극명히 나눴다. '일 잘하는 사람', '일 대충 하는 사람' 딱 두 분류로만 나눴다. 중간이 없었다. 이러한 생각들로 괜히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남을 미워했다.

이 세상에 대한 꿈과 이상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겠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은 곳이어야한다'... 이런 생각 역시 바구니를 짠 마을 사람 같은 생각이다. 이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하는 곳으로 판단하는 것도, 변화를 위해 내가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것도 온전히 나만의 판단이다. 그럼에도 변화를 위해 살기로 했다면, 당신의 선택일 뿐이다. 세상은 요구하지않는다. 당신을 필요로하지않는다. 그런만큼 세상에 무엇을 해줄 필요도, 감사하거나 보답할 필요도 없다. 그럼 부담이 없을 때,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숲속의 자본주의자

이 구절을 보고 뒷통수를 한대 맞은 것 같았다. '공익'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와 타인에게 던졌던 수많은 기준과 잣대는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었던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마치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였고, 가짜자아에 빠져 쉐도우복싱을 하고 있었다. 

'겸손해지자.' 마음먹었다.

여러 구절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책 속 ' 더 많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깨달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더욱더 깨닫게 된다'라는 문장으로 수렴했다. 내가 전등을 갈아끼우지 못하는데, 그 전등을 갈아끼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나보다 최소 하나를 더 잘한다. 내가 못하는 것을 하나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니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동료를 이해하는 마음이 넓어졌다. 나의 미니멀라이프는 물건이 아닌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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