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사랑한 꽃
나의 어린 새는 아름답다. 토론에 발버둥치는 멍청한 새가 아니라 파란 장화를 신은 멋쟁이 새다. 어린 새의 착륙은 작은 세링케티라고 불리는 타랑기레!
나는 그곳에서 나의 유모인 바오바브나무를 만날 생각이다. 아직 그 나무가 있다면, 그리고 기어이 물어볼 것이다. 나의 근원에 대해서.
파란 장화를 신은 어린 새가 뜨거운 태양을 가로 질러 창공을 나르면 나는 꿈속에서 더욱 아름다운 현실을 꿈꾼다. 아프리카는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나는 파란 장화를 신은 어린 새의 날갯죽지가 원하는 곳을 향하기를 바라고 그 원하는 날개가 아프리카의 타랑기레를 택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날개의 자유이고 파란 장화를 신은 어린 새의 자유이다. 나는 날개의 자유를 구속하고 싶지 않은 주인일 뿐.
하늘은 유난히 뜨거웠고, 그 뜨거운 하늘 아래 초원의 동물들도 뜨거운 하루를 시작한다. 가시나무 위에 앉은 빨간 눈을 가진 새가 보인다. 그 위로 주걱부리황새가 날고 있다. 또 그 위로 썩은 고기를 찾고 있는 민목독수리가 거친 날개를 펴고 힘차게 날고 있다. 하지만 나의 어린 새는 잡힐 위험이 전혀 없다.
꿈이 현실보다 아름다운 이유다.
그야말로 초원은 동물들의 낙원이며 자유다. 해마다 150만 마리의 누와 영양, 20만 마리의 가젤과 얼룩말들이 대대적인 이동을 한다. 그 광경을 경이로운, 혹은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나는 금한다. 그것은 죄악이다.
살아가기 위한 그들의 치열한 몸부림을 한낱 구경꾼으로서 바라보는 것은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적당히 아프고, 적당히 슬픈 저마다의 현실은, 삶의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영광이며, 삶의 또 다른 일면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일면을 그저 ‘볼거리’로 생각해서는 안 되기에 나는 스스로에게 금지를 명한다. 파란 장화를 신은 나의 어린 새도 그것을 안다. 자신과 자신을 바라보는 간극에서 마주하는 세상의 진리는 아름다움만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하늘을 난다는 것은 축복이다. 날개는 행복이다. 파란 장화를 신은 어린 새가 날개를 가졌다는 것에 나는 감사한다. 어린 새의 발버둥은 이렇게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다. 늪에 빠진 어리석은 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쁜 장화를 신고 우뚝 서야 한다. 그리고 그 나의 사랑스러운 어린 새는 바오바브나무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잠을 자는 동안의 의무이며, 응원이다. 나는 이 모든 순간들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초원의 평화는 생각보다 오래 가지 못한다. 평화의 광경을 잔혹하게 뒤흔드는 포식자들의 움직임!
태양이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동안, 더위에 지쳤던 포식자들의 움직임은 생기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한 잠시, 포식자들의 중심에 연약한 영양 새끼 한 마리가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다. 아마도 울고 있었을 것이다.
소리 없는 전쟁이다! 무기는 오로지 힘과 행동이다!
거대한 포위망에 둘러싸인 영양의 어미는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한다. 사자와 들개 떼에게 조용히 새끼를 헌납하기로. 그것은 힘이 없는 동물들이 가진 지혜와 경험이 내리는 결정이다.
영양은 생각한다. 얼마든지 건강한 새끼를 낳을 수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것도 자신을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미는, 슬픔조차도 표현하지 못한 채 불편한 안식을 구현한다.
먹잇감을 사자에게 빼앗긴 늑대 무리도 침묵에 동의한다. 그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썩은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야 말로 아쉬울 뿐이다. 그들은 모두 다음을 기약한다. 누구에게나 ‘다음’은 공정한 기회이며 안전한 거래이다!
양육강식의 현실은 꿈보다 잔인하다. 아니 꿈은 어쩌면 현실보다 잔인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 꿈의 일부를 수정하기로 한다.
꿈은 현실보다 아름답지 않다고! [수요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