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사랑한 꽃-6화

달을 사랑한 꽃

by 김도화

격렬한 싸움에 밀려난 늑대 무리와 하이에나들은 다시 먹잇감을 찾아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그때, 또 하나의 표적이 눈에 띈다. 자연의 섭리를 가장한 먹이사슬의 현실은 허점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표범이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표범 위로 파란 장화를 신은 어린 새가 파닥거리며 표범의 주위를 돈다. 이제 일어나라고! 일어나야 한다고!

그런데 세련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날쌘 몸놀림을 가진 표범의 꿈틀거림은 이상하게 더디기만 하다. 그 사이 포식자들은 자신들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여 표범을 에워싸기 시작한다. 예민한 포식자들은 이 표범이 더딘 이유를 대번에 포착한다.

검은 그림자들, 매서운 그림자들이 표범 주위로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을 때, 그 세련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날쌘 꿈틀거림을 가장 먼저 감지한 녀석은 다름 아닌 늙은 구렁이다. 늙은 구렁이의 날름거리는 혀를 바라보는 표범의 얼굴은 한없이 굳어있고, 그 검고 빛나던 매혹적인 눈매가 부르르 떨린다.

표범은, 하마 허벅지보다 굵은 구렁이의 몸이 어째서 그토록 유연하게 움직이는지를 알고 있는 눈치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눈빛은 세상의 모든 것을 삼킬 듯 긴박하고 날카롭다. 먹고, 먹히는 이들의 묘한 관계가 곧 초원의 삶이라는 것을 이 자연은 똑똑히 기억하리라!


여전히 표범은 웅크리고 앉은 채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이 초원의 동물들이라면, 왜 표범이 일어나 달리지 않는지, 왜 치열하게 싸움을 하지 않는지를 알고 있다. 표범의 선택은 어린 새끼다. 포기할 수 없는 새끼들.

지금 표범은 그들과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과 갈등하는 중이다. 구렁이는 그 특유의 능청맞은 속내로 표범의 속사정을 읽어내고 주위의 다른 포식자들이 싸우길 기대하며 이 상황을 기분 좋게 관망한다. 틈을 노리자는 것이다. 늑대 무리가 서서히 배수진을 치고, 하이에나 떼가 늑대 뒤에서 어슬렁거린다.

표범은 사방에서 공격하는 적의 매서운 눈과 직면한다. 서로의 눈빛은 태양이 지는 노을 저편에서 붉고 뜨겁게 반짝인다. 누군가는 죽어야 하고 누군가는 살아야 하는, 질서라는 이름을 가진 전쟁, 묵인되는 전쟁이다.
드디어 때를 기다리던 구렁이가 번들번들한 얼룩무늬를 반짝이며 바위틈을 빙빙 감고 공간을 조여 온다. 순간, 표범의 얼굴에 서린 음영은, 두려움과 분노와 용기와 결단을 내포하고 있다. 새끼를 지켜야 한다는 오직 하나의 절대성은 중요한 결단을 요구한다.

드디어 표범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숨어있던 어린 새끼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표범은 나약한 어린 새끼 한 마리를 미끼로 남겨두고, 두 마리의 새끼를 좁은 바위틈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 한 마리가 이 잔인한 포식자들의 먹잇감이란 사실을 미끼도 모르지 않으리라! 미끼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선택되어져야 하는 이유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나약하다는 것은 초원에서 죽음이다.

어미로서의 선택은 하나 밖에 없고, 두 마리의 새끼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선택을 할 여지는 없다. ‘선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표범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애써 울음을 참고 있다.


구렁이의 몸은 점점 자신을 향해 조여 오고, 뒤에서는 늑대의 무리가 공간을 좁혀 온다. 그런 상황에서 하이에나는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 집중한다.

늑대의 우두머리가 방해가 되는 구렁이를 잡으려 앞발을 내미는 순간, 표범은 재빠른 동작으로 자신의 목숨 같은 어린 새끼 한 마리를 입속으로 삼킨다.

놀랄 일은 아니다!

놀란 것은 구렁이다. 놀란 것은 늑대다. 놀란 것은 하이에나다.

끄응!

드디어 표범의 울음소리가 초원을 쩌렁쩌렁 뒤흔든다. 순간, 그를 에워싼 포식자들은 순식간에 겁을 집어 먹는다. 아픈 새끼를 삼키는 어미의 표정은 분노와 연민과 울음으로 가득 차 있다.

끄응!

포효하는 표범의 뜨겁고, 터질 듯한 울음에 포식자들을 뒷걸음을 치고 파란 장화를 신은 나의 어린 새도 몸부림을 친다.

파닥파닥!

파닥파닥!

파란 장화를 신은 어린 새의 날갯짓과 동시에 어둠을 벗고 일제히 비닐하우스의 형광등에 불이 켜진다. 나는 애도하는 마음으로 어미의 뱃속으로 사라진 어린 녀석의 명복을 빌며 나의 어린 새와도 작별한다.


지금은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지만 살아야 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별, 죽음, 좌절과 같은 삶의 감정들이 가끔은 갈등을 일으킬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 삶의 무게를 내려놓게 만들지 않는다. 새끼의 죽음을 목격한 어미는 가슴 한 구석에 슬픈 기억을 담고 또 초원을 어슬렁거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언젠가 한번쯤은 이별, 죽음, 좌절과 같은 고통에 걸맞은 기쁨과 충만한 환희를 경험하게 될 것을 믿으며 무게의 짓눌림을 기꺼이 견디려 한다. 어차피 자신의 슬픔이 타자의 슬픔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니 살아야 하고, 산다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 그것이 생을 선택하는 이유다.

[수요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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