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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ema Jun 23. 2022

들라크루아 아버지의 수술

들라크루아의 1822년 9월 12일 일기를 읽고.

오늘은 조금 고통스러운 얘기를 해볼까 하니, 남성 분들 중에 공감능력이 뛰어나신 분들은 여기서 그만 읽으셔도 무방하다.


이때는 들라크루아가 형의 집에서 좋은 시간을 보낼 때이다. 일기에는 아무런 정보 없이 '수술'이라고만 적혀 있다. 이 수술은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되었고, 네 번째 수술을 마친 아버지가 "친구들이여, 이제 4막이 끝났네. 5막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세."라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일단 당시에 다섯 번에 걸친 수술이라니 뭔가 심각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석을 바라보면 그 심각성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이것은 “고환육종” 수술이었고, 당시만 해도 이 수술이 집도되는 경우가 드물어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당시의 외과적 시도에 대한 일화가 담겨 있는 소책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입수할 수 있었고, 제목은 다음과 같다. 《고환육종 수술》. 이 수술은 공화력 5년 27일에 시행. 환자는 시민이자, 전 외교부 장관, 그리고 바타브 근처 프랑스공화국 전권사절인 샤를 들라크루아. 수술은 의사 앵베르 드론느에 의해 집도되었다……. 이 책은 정부지시로 공화력 6년에 파리에 있는 공화정 인쇄소에서 발행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 마디 더 덧붙여진 주석은 이러하다.


"샤를 들라크루아는 1979년 9월, 이 위험한 수술을 받았다. 현대에 나온 문서에 의하면, 의학적 견해로 봤을 때 샤를 들라크루아의 수술 후 정확히 일곱 달 후에 태어난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의 아들일 리가 없다고 한다."


오잉. 이야기가 점점 심각해진다. 그냥 수술을 받은  모자라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라고? 여기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있는 책은 놀랍게도 소설 <장송>이었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관계, 그리고  주변인물들과의 관계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보시길. 쇼팽과 들라크루아는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들라크루아 얘기도 많이 나온다. 그러나 800쪽 이상이 되는 책이 1, 2권으러 나와 있으니 약간의 각오가 필요하다...) 그럼 <장송>에서  부분을 따와 읽어보자.


외젠 들라크루아의 아버지가 총재정부기에 활약한 저명한 정치가 샤를 들라크루아라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사실 친아버지는 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 공작이라는 소문은 거의 주석처럼 따라붙는 소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 소문을 그럴싸하게 만들어준 근거가 몇 가지 있었는데, 특히 가장 신빙성 있게 내세워진 것은 당시부터 거의 전설처럼 회자되었던 전 외무대신 샤를 들라크루아의 고환 절제 수술에 대한 일화였다. 1797년 9월, 샤를 들라크루아는 넷째 아들 외젠 들라크루아가 태어나기 약 칠 개월 전에 오래도록 앓아왔던 ‘남성의 가장 소중한 기관’을 치료하기 위한 세기의 대수술을 받았다. 후에 <모니퇴르>지에 생생한 삽화와 함께 공개된 그 병상과 수술 내용은 실제로 환자를 본 사람이 없었더라면 아무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수술에 임하는 샤를 들라크루아에게는 그 모습을 빗대어 ‘임신 구 개월’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환부는 부을 대로 부어올라 가로 이십칠, 세로 삼십칠 센티미터에 무게는 약 십육 킬로그램에 달하는 거대하고도 괴상한 살덩어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갖가지 치료법이 시도되었지만 전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마침내 낭종 전체를 절제한다는 대결단이 내려지게 되었다. 수술은 장시간에 걸쳐 다섯 단계로 나누어 시술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수술 후의 경과도 양호해서 마침내 샤를은 산후의 부인처럼 몸이 가벼워졌지만 봉합 부위가 완치되기까지 그 뒤로도 이 개월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바로 그것이 샤를이 넷째 아들의 친아버지일 수 없다는 근거였다. 그는 아내가 아이를 임신했다고 추정되는-그것도 최대한 멀리 잡아서-시기 전체를 전반은 병에 의해, 후반은 수술 후의 안정 때문에 ‘남성으로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였다. 게다가 더욱 결정적인 것은 샤를이 그동안 아내를 파리에 남겨둔 채 헤이그에서 바타비아 공화국 주재 전권공사로 근무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가 경질된 후에 외무대신 자리를 이어받아 이 전임자의 지위를 보증해주면서 치밀하게도 파리에서는 멀리 떨어뜨려 놓은 장본인이 다름 아닌 탈레랑 공작이었다. <장송>_히라노 게이치로,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흑. 이런 것까지 알게 되니까, 남의 일기 읽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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