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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ema Dec 23. 2022

동화_루돌프 사슴 코는 어두워

삐요삐요.

루돌프 마을에 비상벨이 울렸다. 한 차례 일을 마치고 쉬던 루돌프들은 뿔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로, 산타할아버지가 준비한 산더미 같은 선물을 지역별로 분류하는 일이 끊이질 않았다. 올해는 신기하게도 선물 물량이 다른 해의 몇 배에 달했다. 아무래도 산타할아버지가 마음이 유해진 탓이리라.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다 아는 산타할아버지가 올해에는 조금 나쁜 짓을 해도 진심으로 뉘우친 아이들은 소원은 들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쿠 이런! 그리하여 원래 잠을 즐기는 루돌프임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잠을 반납하고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루돌프들은 있는 힘 없는 힘 짜내어 일했다. 새벽 배송의 선조로서 배송 완료 시간만은 늦출 수 없었다.


모두가 비상벨을 듣고 분류센터로 뛰어간 시각, 루돌프720은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너무 피곤한 탓에 비상벨 소리도, 다른 루돌프들의 허둥지둥 소리도 듣지 못했다. 따스한 극세사 이불을 덮고, 마냥 달콤하게 잠에 빠진 루돌프720은 하늘을 달리다 떨어지는 꿈 때문에 겨우 잠에서 깼다. 헉! 깜짝이야. 진짜인 줄 알았네. 근데 다 어디 갔지? 그제서야 모두가 분류 작업을 하러 갔구나 깨달은 루돌프720은 서둘러 창고로 갔다. 창문에는 열기 때문에 김이 서려 있었다. 동료들 보기 민망했던 지라 고개를 한껏 숙이고 들어갔다. 동료 루돌프들은 마음이 착했기에 그 모습을 보고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를 스윽 만들어주어 조용히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줄 뿐이었다.


이렇게 몇날 며칠 분류작업을 마친 루돌프들에게 대망의 놀이 도착했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중간에 지치면 안 된다. 루돌프들은 단백질 바를 챙기고 무엇보다 중요한, 동그랗고 납작한 버튼 전지를 2개씩 챙겼다. 하룻밤을 잘 보내려면 딱 2개가 필요하다. 사실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인다고 하지만 그건 자연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 코에 건전지를 넣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루돌프 코가 반짝인다는 소문이 돌면서, 행여나 마주치는 인간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고안한 장치였다. 빨간색이지만 반짝이지는 않아 어둠 속에서는 까만색이나 마찬가지인 루돌프 사슴 코. 산타할아버지의 아이디어와 작디작은 버튼 전지 덕분에 이제는 매우 반짝이는 코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반짝이는 코는 루돌프들의 자랑이자 자존감을 높여주는 패션 아이템으로 정착했다. 행여나 전지가 불량이라거나 접지가 제대로 안 되면 그렇게 속이 상할 수 없었다. 일 년에 하루 있는 소중하고 귀한 날, 루돌프들은 누구보다 반짝이는 코로 하늘을 나는 게 소원이었다.


모두가 준비물을 다 챙기고 배송을 시작했다. 누구는 동쪽으로, 누구는 서쪽으로, 누구는 북쪽, 누구는 남쪽. 전 세계 배송을 마쳐야 하기에 루돌프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그중 루둘프720과 친한 몇몇은 새벽 5시 59분에 북극에서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다. 밤새워 배송을 마치고 나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졌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허전했기 때문이었다. 북극에서라도 만나 함께 돌아오면 그래도 마음이 괜찮았다. 친구들과의 오랜 약속이자 전통이었다.


루돌프720은 속도를 내어 선물을 배송했다. 사실 세상에 진짜 산타는 단 한 명이라 할아버지 혼자 모든 곳을 다 돌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소원을 듣고 선물을 준비하는 것은 산타였지만, 그걸 집집마다 배달하는 중요한 임무는 루돌프들이 맡고 있는 거였다. (사람들이 알면 놀랄 일이니 이것은 비밀로 하기로 하자.) 루돌프720은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제 슬슬 할당받은 분량이 줄어드는 게 눈에 띌 정도였고 그만큼 루돌프는 많이 지쳐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이 귀중한 선물을 다 나눠주고 나면 친구들과 만나서 디카페인 라떼를 한 잔 할 것이다. 여명이 트기 전 북극에서 마시는 라떼는 끝내줄 것이다. 루돌프720은 기대감에 힘이 났다. 그렇게 마지막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선물을 굴뚝을 통해 전달하고 나서 잠시 여유를 느끼려는 찰나, 안에서 환호성이, 그리고 곧 이어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루돌프720은 당황했다. 오배송인가? 선물이 바뀌었나? 그리하여 창문 가까이로 날아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염탐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선물이었다. 스노우볼 안에 오르골이 내장된 선물이었는데, 건전지가 없이는 작동이 불가능했다. 루돌프720은 고민을 했다. 마지막 선물인데 아이를 울게 만들 수는 없어. 하지만 내 건전지를 꺼내줘야 하는 건가. 반짝이는 코를 포기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만큼 자부심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오랜 숙고 끝에 루돌프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창문을 두드렸다. 서럽게 울던 아이는 깜짝 놀라 창문으로 달려 나왔다. 그런 후 반짝이는 루돌프 코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래, 이렇게 다들 이 코를 좋아해 주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루돌프720은 코에서 버튼 전지를 빼서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는 손바닥에 놓인 전지를 가만히 보더니 장난감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스리고 스노우볼을 뒤집어 건전지를 끼웠다. 아주 꼭 맞았다.

아이는 스노우볼을 한 번 뒤집은 후 태엽을 감았다. 스노우볼 속 작은 마을에 눈이 펑펑 쏟아졌다. 오르골은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했다. 아이는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루돌프720은 만족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북극에 도착하자 루돌프324와 루돌프910이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루돌프720의 어두운 코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사정을 얘기하니 이내 친구들은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잘했어. 그래, 그래야지. 친구들의 칭찬을 들으니 루돌프720은 더욱 기뻤다.

셋이서 함께 디카페인으로 카페라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친구들의 반짝이는 코를 보아도 루돌프720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귓속에서는 아직도 오르골에서 나오던 그 음악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행복한,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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