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병스런 열병. 15

물컹 밟히는 안개

어느 날부터 안개가 도시를 점령했네요. 입 막은 비명이 신음처럼 떠돌고 붉은 깃발처럼 떠도는 슬픔들이 여기저기 나부끼죠. 행인은 보폭을 줄이고 운전사는 쌍라이트를 켜고서 비상등 점멸. 순백이 깜빡이는 거리는 불온한 상상력을 부풀리죠.


배 댈 곳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농이 퍼지고 안개에 몸 숨긴 무리들의 날 선 웃음이 섬광을 발하죠. 베일 듯한 위압감은 조롱이나 멸시겠죠. 반듯하면서 각진 도시의 안개. 아귀를 맞추는 퍼즐을 좋아했다고 애써 위안해요. 나는 안개의 각을 더듬으며 행선지로 향하죠.


사랑을 말해줘, 악에 받친 여인의 고함 소리가 잠시 안개를 가르네요. 흐느끼는 소리가 썰물처럼 안개의 벽에 찰랑거려요. 순간 방향을 잃은 나는 날 선 안개를 놓치고 울음소리에 기댄 채 여인을 찾죠. 찰랑거리다 철썩대는 파도 소리가 덩치 키운 채 날 덮쳐요. 물의 공포가 자꾸 목을 조르네요. 입으로 코로 무섭도록 차오르는 바다를 어푸, 어푸 뱉어내죠. 뱉을 때마다 경직되고 발악할수록 굳어버리는, 서둘러 귀를 막고서


악을 쓰며 사랑해, 사랑해


돋은 힘줄이 파랗게 안개를 물들이네요. 나는 침몰하고 있죠. 키득거리며 비웃는 소리들이 온몸을 잡아채고 혀 차며 고개 젓는 이의 얼굴이 찰나처럼 지나요. 악 삼킨 안개가 자꾸 굳어가고요


어느 날부터 안개가 도시를 점령했어요. 순백의 거리가 비상등을 점멸하며 찰랑대죠.

발끝에 물컹 밟히는 안개는 파랗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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