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읽기
좋은 시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가끔씩
수업 중인 학생들로부터, 학부모 독서토론회 때 학부모님들에게서도 받곤 한다.
그들의 궁금증의 원인은 대개 요즈음의 시들이 너무나 난해하다는 항의와 원성을 내포하고 있다.
시가 왜 그리 어려워졌냐고? 도대체가 그런 암호같은 시들은 좋은 시들인가?
sns로 유행하는 짧은 글귀의 시(?)들은 과연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는가?
국문학을 전공했고, 어찌됐든 오래도록 시에 매달리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질문은... 애초에 문학이라는 장르는, 저 수능시험이 강요하는 오지선다의 문항 따윈 없으며
하나의 정답은 애시당초 불가한 영역이기에... 사실 난감하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럼에도 안개 속에서 길을 찾듯 희미한 실마리의 이야기는 건네야 했기에 나름의 답변을 하곤 했다.
"시는 그 어떤 시들이든 나쁜 시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쉽게 씌어진 시든 어렵게 쓴 시든...
중요한 건 시를 쓴 사람의 '진실한 마음'이 그 시 안에서 피어나고 있느냐가 아니겠는가고..."
-이은희
머리에 쥐날 것 같은 고통
그 난해함은 누구를 위한 창조물이었을까?
알아들을 수 없는 미지의 방언 같은 언어들이
쏟아진 채 뭉쳐 있는 종이들
추세가 그렇다지만
유행을 따른다지만
어찌 그들의 머릿속 언어들은 한결같은
힌트조차 없는 암호들의 나열인 걸까?
누구를 위해 그들은
시를 쓰는 걸까?
이은희 시인은 작금의 한 시의 패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추세가 그렇다'고 '유행을 따른다'고 제작되는 듯한 난해시들을.
물론 그 비판은 그저 어려운 시들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렵다'는 것과 '난해함'에는 비슷한 듯 다른 무언가가 있기에...
시는 어려울 수 있다. 무언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시인의 고투가 문학적 상징과 비유를 거치면서
이질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기에 기시감이 없는 어떤 낯섦이 '어렵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다만 문제는 '미지의 방언같은 언어', '힌트조차 없는 암호'들이 나열된 듯 난해하게 제작된 시가 아닐까.
그저 무언가 새로움의 진리를 설파하기 위해 어려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듯이 보이는 시, 시들.
오랫동안 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며 읽어도 도무지 어떤 실마리조차 짐작할 수 없는
그런 시, 시들.
이은희 시인이 비판하는 지점은 거기에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마지막 연의 반문은 지금 이 땅에서 시를 쓰려는 자들에게 던져지는 반문이다.
'누구를 위해 우리는 시를 쓰는 걸까?'
시는 결국 자신을 너머
읽는 이(독자)에게 가 닿기 위해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걸 '감동'이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이은희 시인은 아마도
시는 자신의 진실된 마음으로 쓴 시가 읽는 이(독자)의 마음 속에 어떤 물결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 때 함께 시를 쓰던 한 후배가
시를 배우는 은사(스승)의 조언(?)을 받으며 열심히 유명한 문단 데뷔를 위해 각개고투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시를 뽑아줄 당시의 심사위원들의 경향과 시의 흐름에 대해 그는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매 주 두 편 씩 써간 시들을 은사님의 세세한 코치를 받으며 퇴고하고 또 퇴고했다.
그리곤 몇 년 뒤에 화려하게(?) 등단했다.
그 친구의 고군분투에 대해 뭐라 말할 깜냥이 내겐 없다. 다만, 그 친구가 자신이 쓰고자 하는 시어를 버리고
너무도 손쉽게 스승이 조언한 언어와 구절들로 바꾸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
우스개 소리로 시를 읽는 사람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얘기가 낯선 풍문처럼 들린다.
또 우스개 소리로 시집을 사서 읽는 사람은 시인들 뿐이라는 풍문도 곧잘 들리곤 한다.
그것이 지금 여기의 문학현실이다.
세속적인 부와는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예술장르인 이 무용한 시를 쓰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은 왜 그리 많을까? 도대체 그들이 시를 써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세속적인 부와는 성질이 다를 뿐... 정신적인 명예를 얻고자 하는 마음은 아닐까.
자신의 자의식의 과잉을 시라는 고상한 예술적 장르로 표현해 무언가 고상함의 가치를 획득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런 현실 속에서 독자들은 시를, 시집을 멀리한다. 오직 sns상으로 떠도는 시들을 보고 신뢰한다.
시가 다시 독자를 조금이라도 진실된 문학의 현장으로 불러모으기 위해선
시인의 진실(진심)과 '감동'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은희 시인의 마음도 그러하다.
이은희 시인과의 인연에 영원한 청년시인 '윤동주'가 있다.
학교 교실에서 외롭고 쓸쓸할 때 쓰곤 했던 시 중에 '동주를 상상함'이란 시가 있다.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지 않고 돌아왔다면
그는 아마도 선생님이 되었을 것이고... 아이들에게 모국어와 영어, 시를 가르치는 섬세하고 부드럽고 멋진 선생님이 되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썼던 시이다.
그 시를 브런치에 올렸고, 이은희 시인의 응원과 댓글이 따스하게 도착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한 팬심을 숨기지 않는... 마치 아이돌에 덕질하는 소녀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시집을 읽으며 그 마음이 진심 그 자체였구나... 라고 안다. 아니 느낀다.
나는 시인 윤동주처럼 살기 위해 다시 노력하자
영혼의 순수함을 좇고
거만하지도 교만하지도 어정쩡히 난체하지도 말며
순결하게 순수하게 한 줄기 바람처럼 살자
한 줄 시를 쓰기 위해 고민하는
누구도 모함하지 말고
그러나 지혜로워서 모함에 걸려드는 어리석음도 범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오늘도
간절히 빌어보자.
- 이은희 시인의 「기도」중 일부
시인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허세를 부렸을까?
하루 한 줄 시를 쓰는 것도 아니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가슴앓이를 했던가?
한 자락 지친 마음도 위로하지 못하면서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돌아볼 수 있었나?
세상을 바로 보고 비판할 줄 모르면서
한 줄 제대로 된 시조차 쓰지 못하면서
얼마나 착각 속에 살았던가?
나는......
- 「시인이란 이름으로」전문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한 번도 얘기해본 적 없는 그를
단 한 번도 나와 함께 웃어본 적 없는 그를
정말로, 정말로 잊을 수가 없어서
그가 그렇게 바라던
그와 나의 별에 봄이 온 지 오래이건만
아직도, 아직도
가슴이 저며 옵니다
-「함께 웃을 수 있을 윤동주를 만날 때까지」중 일부
윤동주란 이름은 왜 영원히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가?
그가 만 서른이 안 되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그가 식민지 젊은 청년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아파하다 죽었기 때문에...
그가 믿었던 기독교적 순결의식과 희생양의 대리인 같은 어떤 이미지 때문에...
여러 가지의 다채로운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이은희 시인의 동주앓이의 시편들을 놓고 보면
첫째, 그에게는 '허세'가 없었다. 겸손함이 마음에 배어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를 그는 썼다. 누군가가 보아주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이 썼던 시, 시들.
둘째, 그에게는, 그의 시에는 '사랑'의 마음이 진실되게 담겨 있다. 사랑의 대상이 나, 너, 그리고 세계라면 그의 시에는 그 대상들에 대한 순결한 사랑의 마음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가슴앓이'의 모습이 다채롭게 변주되고 있다.
셋째, 그에게는, 그의 시에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때때로 지나치게 염결한 도덕청년처럼 자신에 대한 성찰이 스스로를 찌르는 못처럼 제 안을 아픔과 고통스러움으로 깊게 박히고 있지만... 뒤돌아 볼 줄 모르는 광포한 세상의 모습과 대비되어 역설적으로 순결한 느낌으로 감동을 자아낸다.
'겸손', '사랑', '성찰'... 이 세 가지의 단어들이 윤동주의 시편들에 오롯이 한 올 한 올 새겨져 있으며, 그 마음을 우리는 시를 통해 절절히 읽고 마음 속에 어떤 파문을 감지한다.
이은희 시인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너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묻고 있다.
과연 우리는 그처럼 시를 대하고 시를 읽고 시를 쓰고 있는가를...
그리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한 번도 얘기해본 적 없는' 그의 마음을 스스로의 마음에 새기고자 한다.
그렇기에 '잊을 수가 없다'는 말은 지금 여기서 그의 마음 한 자락이라도 닮은 시를 쓰고 싶다는 동경과 열망을 낳는다.
윤동주를 '잊을 수가 없는' 사람이 어찌 세속적인 성공과 강자의 논리를 따르겠는가.
이은희 시인의 마음의 눈이 가 닿는 곳은 그늘진 음지, 소외의 영역이다.
커다란 어항 속
초록 이끼들 틈새서도
홀로라도 늘 제자리를 지키던 너
어느 아침
들여다본 어항 속
너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구나
푸른 수초, 하얀 산호
다 살피어도 보이지 않는 너
<중략>
이 어항이 이제는
누구 하나 흔들어줄 이 없어
고요하기만 하다
- 이은희 시인의 「외로운 수족관 속 주검」중 일부
'반려'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우리 곁에 두는 동물은 어떤가.
작고 작은 열대어의 죽음을, 그의 주검을 보고 시인은
'홀로라도 늘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모습을 떠올린다.
열대어인 '너'에게 어쩌면 '어항'은 바다라는 세계였을 것이고, 그 작은 몸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시인은 따스하게 들여다 보고 있다.
이제는 '누구 하나 흔들어줄 이 없어'라는 표현은... 그 작은 '너'가 어항 속을 헤엄치며 나의 세계를 흔들어 주던 '반려'라는 말일 것이다. 그 '반려'를 잃은 비애가 '고요'함으로 잔잔히 가라앉는다.
불 켜진 작은 버스정류장
저 외로운 벤치 하나
작은 버스정류장 낡은 전등을
조명 삼고 앉아 있다
무슨 사연이라도
꼭 있어야 할 것처럼
텅 빈 가슴이 안쓰러워
자꾸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
이미 버스는
끊긴 시각.
얼마나 오래도록
새벽 첫 버스를
기다리게 될까?
- 「잠들지 않는 밤 버스정류소」중 일부
종점의 버스 정류장을 떠올린다. 지금 이 계절처럼 눈이 폭폭 내려 쌓이는...
가난한 젊은 남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서둘러 어딘가로 가고 있고
내리고 타고 분주히 오가는 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밤.
'외로운 벤치' 하나 '앉아 있다'.
'자꾸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은 사람. 막차는 이미 끊긴 밤.
이제 별의 눈빛 아래 새벽의 '첫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의자, 사람.
망망대해 푸른 바다
깊은 그곳에서
너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행복한 꿈을 꾸었으리라
찬란한 빛
깊은 그곳의 틈새까지
골고루 비춰줄 때면
너는 어떤 따사로운 꿈을 꾸었을까?
커다란 양은 대야
가득 찬 초록 머릿결
흐르는 물결로 어루만지면
하늘하늘 부끄러워 흔들리는 몸짓에
나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어린다.
-「미역의 꿈」중 일부
한때 머리를 풀어헤치고 자유롭게 망망대해를 유영하며
자신만의 행복한 꿈에 젖었을 미역을 의인화한 위 시를 보라.
사람이라는 타자의 손길에 의해 지상으로 건져 올라왔을 때 비치던 빛, 햇살에
미역(너)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시인의 상상과 질문은
미역을 씻으면서도 이어진다. 미역의 초록 머릿결은 미역(너)의 머릿결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머릿결이다. 시인은 마치 자신의 꿈을 어루만지듯 흐르는 물결처럼 부드럽게
미역(너)의 꿈과 머리를 어루만진다. 그렇기에 '나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번졌으리라.
이 밖에도 위에 언급하진 않았지만...
'늙은 햄스터의 죽음', 이미 시대적인 상징이면서 영원히 아픔으로 오롯이 남은 '무등산',
2014년 전국민을 충격으로 몰아갔던 비극적 사건 '세월호'의 별이 된 아이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소소한 일상 뿐만 아니라 너와 세계의 고통에 대해서도 연민과 공감의 눈, 그리고 손으로 어루만지려 노력한다.
이처럼 윤동주를 사모하고 동경하고 그의 시심을 열망하는
이은희 시인의 눈은 작고 여리고 하찮아 보이는 대상들에 가 닿는다.
시란 대단하고 화려한 무언가를 누군가를 조명하는 장르가 아니다.
그늘지고 아파하고 비애에 절망하는 무언가를 누군가의 곁에서 함께 있어주고 그 마음의 결에 기꺼이 동참하는 일이다.
이은희 시인의 시들은 기꺼이 그 동참의 대열에 뛰어들고 있다.
이은희 시인의 시집 '아이러니 너'의 2부와 3부에는
시인 자신이 관통해 온 삶의 시간들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시인 자신을 길러 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는 슬픔과 고마움의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으며, 자신이 기르고 키운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어머니란 존재로서 살아 온 삶의 희노애락을 드러내고 있다. 거울을 보며 세월의 더께나 흔적이 자리한 얼굴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모습부터
나이를 먹더라도 늘 소녀의 청순함으로 사랑과 순수를 간직한 첫사랑 소녀로 남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함께 세월의 무상함을 겪는 비슷한 동년배의 사람으로서
이은희 시인의 상실감과 나름의 슬픔에 크게 공감하며 읽었다.
그러나 한편 시인과 나, 그리고 우리... 지금 이 시간의 흐름을 어쩌지 못하는 존재의 인간들은
무상(無常)함에 대해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항상 일정함이 없이' 변하는 모습을... 니체의 말처럼 '거룩하게 긍정'하고
새롭게 다른 걸음을 디디려고 애써야... 이 삶을 좀더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상념.
마치 제 안에 남몰래 나이테를 새기고 키우는 나이들어 가는 나무처럼...
그런 상념 속에서 하마터면 놓칠뻔한 시가 있다.
이미 이은희 시인은 그렇게 제 안에 나이테를 새기고 키우는 방향으로 삶을 향유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
하얀 팝콘 터지듯 흐드러지던 벚꽃은
갑자기 찾아온 호된 빗줄기 이기지 못하고
초록색깔 얇은 속옷을 그대로 드러냈다
작은 아들 초등학교 1학년 반 모임에 갔더니
내 나이 마흔 하나 이젠, 꼭 그만큼으로 보이는 건지?
집에 와 들여다본 거울 속 내 모습
스무 살 수줍은 생기는 어딜 가고
깊은 눈가 주름, 유난히 일찍 난 새치가 낯설다
여고 시절 한문 시간 배웠던 선생님의 가르침
꽃은 십일 이상 붉은 것이 없다던 '花無十日紅'이
오늘은 더 가슴에 또렷이 새겨진다
이제 난,
꽃 대신 마음 속 상록수
한 그루 키우며
살아야겠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전문
이은희 시인님.
부디 지나 온 삶에서 느끼시는 비애나 슬픔을 너무 곱씹지 마시고
늘어가는 주름과 새치에 주눅들 것도 없이
시에서 다짐한 '상록수' 한 그루 마음 속 깊이 뿌리내려
오래오래 키우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