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죽박죽 가족 연대기 7

화장실과 우유

by 김병호

9. 향기 그득한 곳


처음 서울에 정착해서 지낸 곳이 버스회사 마당 한편이었는지, 외가 친척집 문간방이었는지 나는 기억이 거의 없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언제 우리 집을 장만했는지 또한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서울 변두리, 아버지가 다니던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은 그래도 여름에 큰 다라이 정도는 놓을 수 있는 마당이 있던 오래된 목조 한옥이었다. 그렇다고 드라마에 나오는 그윽한 양반 한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서민들이 사는 옛날 집이라는 표현 이상은 아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이웃과 경계인 벽을 오른쪽에 두고 대여섯 걸음 길이의 골목이 이어진다. 그렇게 골목을 지나면 바로 눈에 띄는 것은 마당의 배꼽 같은 수도와 까만 철 손잡이를 들었다가 누르면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뽐뿌’라고 불렀던 물펌프가 있고, 물을 받아놓는 붉은 고무통이 보인다. 그 너머로 여기저기 합판의 결이 일어나 하늘색 페인트칠이 무색한 화장실 문이 보인다. 그러니까 대문과 화장실 문이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모양이다. 자칫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온갖 힘을 주다가 길가는 사람과 눈이 마주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이런 일은 현실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임계점까지 버티며 정신없이 놀다가 급하게 화장실에 뛰어들기 때문에 화장실 문을 꼼꼼하게 닫는 일에는 건성일 수밖에 없다. 아니면 하나뿐인 화장실이기에 순번을 기다리다가 입실하는 경우도 급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지옥으로 이어진 통로 같은 사각의 화장실 구멍 위에 부랴부랴 쭈그려 앉은 상태에서 어린아이에게 문 안쪽의 손잡이는 멀기만 했다.


어른 손가락 두 개 크기의 마름모꼴 나무 조각이 스르르 바깥으로 열리는 문을 붙잡고 있는 잠금장치였다. 나무 조각의 한가운데를 못으로 박아 문에 고정시키고 못을 중심으로 회전시켜 가로로 누이면 나무가 벽을 붙잡고 버텨 문이 열리지 않고 세로로 세우면 문은 바깥을 향해 자동으로 열린다. 바지를 내리고 일차적인 응급상황을 해결하다 보면 잠그지 않은 나무 잠금장치가 눈에 띈다. 이내 손을 뻗어보지만 화장실 손잡이는 점점 더 멀어진다. 쭈그려 앉은 상태에서 앞섶을 부여잡고 발을 조금 옮겨보려고 용을 쓰다가 길 가는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여기에 일부러 문을 열어제끼고 도망치는 나쁜 동생 놈들도 있었다. 바로 그 쌍둥이 동생들은 상황이 급할 때면 엉덩이를 마주대고 서로 반대방향을 보고 앉아 동시에 큰일을 보기도 했다. 자주.


그렇게 화장실이 보이면 바로 왼쪽으로 본채가 나온다. 본채를 둘러보기 전에 다시 뒷걸음으로 대여섯 걸음 돌아가면 대문 앞 왼쪽에 손바닥보다 조금 넓은 부엌 하나와 이에 붙은 방이 나온다. 예전에 꼬마 하나 키우는 신혼부부가 몇 팀 살다 나간 갓 같고 이후 형과 내가 쓰던 방이다. 이 방은 길 쪽으로 작은 창이 나있었고 고등학생이던 형이 이 창문에 붙어 담배를 피우던 모습도 기억에 있지만 흐리다. 아닐지도 모른다. 그 창으로 많은 장면을 보았고 많은 소리를 들었다. 초저녁이면 들리던 굵직한 목소리도 이제는 흐릿하다.

“야, 병구야. 뭐 하냐?”

형의 이름이다.


그 방 부엌에도 아궁이가 있었고 그 위에 큼직한 솥이 항상 들어앉아있었다. 그래서 물은 항상 따뜻했다. 내는 국민학교 시절 그럭저럭 성적은 괜찮았는지 월말고사를 보면 빼지 않고 상장을 타 왔다. 그러면 아버지는 우유를 한 병 사 주셨다. 탐스럽게 볼록하고 둥근 유리병은 위로 올라가면서 바로 홀쭉해진다. 이 우유병을 솥에 넣고 데웠다. 적당한 시간이 흐르고 우유병을 꺼내 입구를 감싼 비닐을 뜯으면 우유회사의 로고가 그려진 종이로 만든 마개가 우유가 넘치지 않게 막고 있다. 이제 손가락으로 종이 마개의 한쪽을 누른다. 눌린 마개는 반짝 일어서 살짝 들어낼 수 있다. 이때 손가락이 우유에 잠기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손가락을 빨아먹는 맛은 어쩌면 우유 한 병을 다 마시는 일보다 훨씬 짜릿했다. 당연히 마개를 누르는 손가락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진다. 손가락은 더 깊이 들어간다. 손가락을 빨면서 돌아보면 거기에는 두 동생이 입이 벌어진 넋 빠진 모습으로 펼친 데칼코마니처럼 서있다. 이제 스테인리스 국그릇을 꺼내 똑같이 우유를 나눈다. 물론 똑같을 수는 없다. 나이가 다르니까. 설탕 한 숟가락씩 넣어 젓는 일도 잊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에 할 일은 입가에 남은 우유 스마일과 그릇에 남은 하얀 우유의 자국을 혀로 지우는 일이다. 우리는 아주 훌륭했다.



98-1호 (8회용그림).jpg 일러스트 by 파더맨 (도터맨 사보타주 중) 도면은 내 맘대로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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