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삶은 패배의 연속이다. 시험이나 면접에서 탈락하는 것에서부터, 내 의견이 묵살당하고 내 행동이 제약받는 것까지. 패배란 단어의 의미를 넓게 잡으면 잡을수록, 인간은 수없이 패배하고 좌절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오늘날에 슈퍼히어로 장르가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현실에서 느끼는 무수한 패배감들을 영화 속에서나마 극복하고, 짜릿하면서도 환상적인 승리를 경험하고 싶다는 심리적인 요인이 분명히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본다.
하지만 어벤져스 3편인〈인피니티 워〉에서 우리는 영웅들이 극강의 악당 앞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무릎 꿇거나 죽는 것을 보고 말았다. 영화 속에서나마 승리를 맛보고 싶던 관객들의 희망은 깨졌지만, 타노스의 승리로 인해 우리는 영웅들에게 훨씬 더 많은 공감과 이입을 할 수 있게 됐다. 한두 명의 영웅도 아닌, 영웅‘팀’마저도 패배라는 걸 경험한 것이다.
그들의 패배와 그에 대한 관객들의 감정이입이 이뤄진 상태였기에〈엔드게임〉이 보여주는 극복과 승리의 서사는 정서적으로도 더 많은 몰입을 가능케 했다. 물론 그들은 말 그대로 ‘영웅’이었기에, 그들의 실패 역시 현실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려 우주 전 생명체의 절반의 목숨.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그것도 슈퍼히어로 장르의 작품이기에 더더욱 가질 수밖에 없는 ‘해피 엔딩’에의 방향성을 관객들이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 전 생명체의 절반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영웅이란 타이틀 자체가 흔들릴 정도의 실패임에는 틀림없는 것이었다.
이런 처참한 실패와 패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시간여행은 기존의 수많은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시간여행과는 분명히 다른(더 진일보한) 물리학적 관점을 토대로 두고 있는데, 이는 물리학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의 삶에 매우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어벤져스가 과거로 되돌아가 그곳에서의 승리를 이뤄냈다면, 그것은 역시나 판타지적인 요소에 전적으로 기반한, 관객들에게 그저 오락적인 쾌감만을 주는 서사가 됐을 것이다. 실제로 이 현실을 살아가며 패배를 겪는 우리들에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길 따위는 결단코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엔드게임〉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시간여행이란 소재 자체는 역시나 판타지적인 요소이며(현재로서는), 여러 시간대의 과거로 이동하는 것 역시 불가피한 전략으로서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영웅들이 승리를 거두기 위해 최후의 전쟁을 치르는 시간대는 바로 현재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며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어떻게든 현재에서의 분투를 통해 극복과 승리의 미래로 나아간다는 이 지점이, 판타지로 가득한 어벤져스 시리즈가 우리의 현실에 던져주는 시사점이다.
우리는 분명히 패배하며, 그것은 바꿀 수 없는 과거가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좌절감을 남긴다. 우리가 그 후에 더 큰 승리를 겪더라도, 과거의 패배가 남긴 흔적은 어떤 형태로든 잔존한다. MCU 속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과 기존에 살아남았던 이들의 삶 사이에 존재하게 된 5년이란 시간차 역시 바로 그 흔적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패배를 겪는 우리도, MCU 속에서 패배를 겪은 캐릭터들도 결국은 새로운 현실에 잘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어찌됐든 패배는 과거가 되고, 그 흔적을 끌어안고도 살아갈 힘을 주는 새로운 승리가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토니 스타크의 유언처럼 그 과정에서 우리는 소중한 무언가를 잃을 수도 있지만, 스티브 로저스의 말처럼 결국엔 이길 것이라는 믿음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마침내 그 믿음이 실현될 수 있다는 긍정을〈엔드게임〉은 보여주었다.
‘계속 넘어지다.’라는 문장이 성립하기 위해선 ‘계속 일어서다.’가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일어서지 않고 계속 넘어지는 것이 불가능하단 사실과 달리, 승리하지 못하고 계속 패배만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뼈 아픈 논리적 타당성을 따지기보단, 다소 비논리적이더라도 ‘계속 패배한다.’의 전제 역시 ‘계속 승리한다.’라는 믿음, 결국 우리는 살아가며 패배하는 만큼 승리도 경험한다는 믿음을 품어보는 건 어떨까. 우리의 주체성이 살아나는 순간, 경쟁이나 시합에서 이기는 순간, 우리의 의견이 수용되는 순간, 우리가 품고 있던 존재적 가치가 빛나던 순간들이 "분명히"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승리를 향한 비논리적 믿음은 삶을 향한 긍정적인 신념으로 충분히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삶은 승리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