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인 <언브레이커블>이 데이빗 던의 각성을, 2편인 <23 아이덴티티>가 비스트(케빈 웬델 크럼)의 각성을 그려냈다면, 3편인 <글래스>에서는 미스터 글래스(엘리야 프라이스)의 각성을 본격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미스터 글래스는 1편에서 자신과 대립되는 데이빗 던의 자아를 정립함으로써, 자신의 빌런으로서의 정체성 역시 드러내 보인 바 있으나, 그것은 비아(非我)의 정립을 매개로 했다는 점에서 다소 간접적이고 미완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천재적인 두뇌능력을 발휘하여 설계의 마지막 단계까지 성공시키는 활약을 통해, 미스터 글래스가 이번 작품에서야 비로소 직접적이고 완성된 각성에 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쉽게 깨지고 부서짐’이라는 유리의 약점에 가려져 있던 ‘예측불가의 날카로움’이란 강점이 마침내 폭발하며 빛을 발한 셈이다.
<글래스>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동일한 인물들이 전혀 다른 양상의 두 대립 구도 안에 동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던 ‘두 명의 빌런 vs. 한 명의 히어로’라는 관계가 1차 구도라면, 그 셋 모두를 ‘과대망상증 환자’라는 동질적인 그룹으로 묶어 정신과 의사인 스테이플 박사와의 대척점에 놓은 관계가 2차 구도이다.
과학과 논리로 중무장한 스테이플 박사는 세 명의 주인공이 발휘하는 비현실적인 비범성의 근저에 믿음과 감정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 점을 공격하며 주인공들의 정체성을 뒤흔든다. 점차 압박해오며 1차 구도의 실체를 약화시키는 다각적 폭력 앞에서, 일반 관객은 물론이요, 극 중의 주인공들조차(공격을 당할수록 예리하고 날카로워지는 미스터 ‘글래스’는 역시나 예외였던 듯하다) 자신들이 지닌 초능력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된다.
극의 종반부에 다다라, 마침내 스테이플 박사의 정체가 드러나며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계획했던 반전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 가장 큰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스테이플 박사가 그저 악당조직(비범성을 부정한다는 철학과 ‘세 잎 클로버’라는 표식이 제법 잘 어울린다)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1차 구도와 2차 구도 간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새로운 3차 구도가 형성된다는 사실(그리고 그것의 의미)이다.
과대망상증 환자로 오인되던 모두를 비범한 초능력자로서 인정하면서도(1차 구도의 관점) 서로 간의 차이보다는 동질성을 강조하는(2차 구도의 관점) 세 번째 대립 구도에서, 그 세 인물이 마침내 함께 속하게 되는 그룹의 타이틀은 바로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믿고 발휘하는 자’이다. 이는 곧, ‘현실을 외면하는 자’가 ‘진실을 직시하는 자’로 탈바꿈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극 중에서 가장 거대한 악이 되어버린 스테이플 박사와의 대비를 거쳐, 데이빗 던과 비스트와 미스터 글래스는 비로소 ‘그들’이라는 하나의 대명사로 통칭되기에 손색없게 되며, ‘마스터’ 글래스의 결정적인 활약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향한 확신’이라는 보편적 메시지의 체현자들로 거듭난다. 그 메시지의 체현자들인 한에서 그들은 1차 구도 상의 선악에 관계없이 모두 히어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데, 특히 비스트와 마스터 글래스라는 살인자들에게 그 멋지고 숭고한 지위를 허락하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이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역전이자 반전이다.
“중요한 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던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처럼,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전작들에서부터 구성해오던 선악 구도마저 뒤흔들었고, 그것이 가져온 반전효과가 메시지의 전달력을 극대화시키는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 메시지와 관련하여, 어쩌면 이 영화의 제목이자 ‘유리’라는 뜻의 보통명사인 ‘Glass’는 엘리야 프라이스를 포함하여 던과 케빈 모두를 아우르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들 모두가 고통 받고 깨짐으로써 예기(銳氣)를 띠게 된 조각들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간다는 것인데, 한계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결코 해내지 못하는 것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불가능성을 인지하게 된다는 그 사건이, 동시에 ‘그렇다면 나는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 존재인가’라고 하는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성찰과 각성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감독은 불가능성에서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이 역설을 발판삼아 메시지를 도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나 신념과 확신이라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도덕적 선악의 잣대마저 짓이겨버리는 과감성은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