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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칠리아정 Sep 09. 2023

술잔 타령

술을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고 마시지도 못 하지만 술잔을 좋아한다. 아니 술이 담긴 각각의 잔을 좋아한다고 하는 게 맞겠다.

오늘 식당에서 산사춘을 시켰는데 종업원이 진로 소주잔을 가져왔다. 내가 산사춘잔으로 갖다 달라고 했다.

산사춘

물건이 만들어질 때는 그 용도에 맞게 만들어졌을 테니 창의적으로 쓰이는 용도가 아니라면 만들어질 때부터의 그 용도대로 쓰이는 게 그 물건에 가장 잘 어울릴 것일테다.

나이 많은 종업원은 내 주문이 재밌다는 듯 맞장구를 쳐 주었다. 역시 진로는 진로잔에 산사춘은 산사춘잔에 잘 어울린다. 옅은 보릿빛 입자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부딪히며 찰랑거리는 소리가 영롱하게 느껴진다. 이래서 반드시 산사춘은 산사춘잔이어야 한다.

나는 술보다 술잔에서 술들이 내는 빛깔과 그 입자들이 내는 소리가 좋아 사실 술을 마신다기보다 소리를 마신다고 해야 옳다.

 소리를 한 모금 머금으면 술도 내 속에서 맑은 소리를 낼 것 같은 것이다.

와인 - 구글

와인도 그렇다. 와인잔은 온도 유지를 위해 과학적으로 손잡이를 길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심리적으로 분석해도 와인잔은 딱, 그 모양이어야 한다.

와인은 다른 술보다 거리가 있다. 상대와의 거리도 있지만 마시는 사람도 잔과의 거리를 지킨다. 누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와인은 소주보다 우아하고 양주보다 절제가 느껴진다. 이유는 잔이 위태로워 조심하고 천천히 잡아야 하고 그러려면 잔을 응시해 줘야 하기 때문에 그 앞에선 지긋해진다. 조급하지 않고 옹색하지 않게 된다. 와인을 따라 놓은 잔 앞에서 싸우는 사람이 있을까? 싸우더라도 우아한 품위를 유지하느라 제대로 된 싸움은 안 될 것 같은 것이다.

막걸리 - 쿠팡

요즘 막걸리잔이 좀 제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막걸리 하면 양은잔이 딱인데 양은의 좋지 않다는 재질로 스뎅(스테인리스) 또는 유리잔으로 옮긴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생각했는데 방짜유기에 따라 마시면 어떨까 싶다. 그렇게 되면 막걸리도 만만치 않은 위치로 올라? 가게 된다. 서민들의 상징인 막걸리와 왕실 상징인 유기의 결합.


사소함이 이렇듯 은유이고 상징인 것을.


방짜유기 막걸리잔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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