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체칠리아정 Jan 13. 2024

화날 때 욕 좀 하면 어때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몰아봤다.

방영 당시에는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어둡고 칙칙해 안 봤는데 관심 배우가 생기고는 그의 드라마를 찾다가 보게 되었다. 나의 관심 배우는 드라마에서 구 씨를 연기한 손석구 님인데 드라마를 보면서 극 중 염미정에게 관심이 옮겨졌다. 이유는 지금 빌딩숲에서 살아내기 위해 소극적으로 치열한 수많은 염미정이 생각났고, 그중 '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염미정은 색깔로 비유하자면 회색빛이다. 드러나지 않지만 우두커니 자기 입지가 확실한.

극 중 인물소개에서 염미정을 ‘사랑받을 자신은 없지만, 미움받지 않을 자신은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무표정하다가도 눈앞에 사람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미소. 사회적으로 적응된 인간.’ 이 땅의 많은 염미정들이 공감하는 캐릭터다.


구 씨는 염미정이 사는 동네에 외지인으로 들어와 염미정 아버지의 공장일을 돕는 인물이다. 이 동네에 오기 전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극 중 인물들도 크게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 한다. 시청자인 나도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드라마를 본다. 구 씨는 하루를 견디는데 술만큼 도움 되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주정을 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술만 마신다.


그런 구 씨에게 어느 날 염미정은 본인을 추앙하라고 한다. 사랑이 아닌, 추앙. 이런 염미정을 보고 미쳤냐는 사람도 있었지만, 염미정을 잘 아는 친구는 염미정이 죽어가는 구 씨를 살리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 시청자인 나도 그 말에 공감이 갔다. 그런 계기로 두 사람은 조금씩 인간대 인간으로 서로를 추앙하면서 존중하게 된다.       


드라마가 고지로 치닿고 하강할 때쯤 자신을 최대한 바닥으로 끌고 가 스스로를 짓이기며 괴롭히는 구 씨에게 염미정은 말한다.


“나도 아침에 일어나 양치를 하면 수많은 죽이고 싶은 새끼들이 몰려와, 막 몰려와 그래서 나도 욕해. 개새끼. 개새끼.” 염미정은 구 씨가 그런 이유에는 사람 관계가 가장 크다는 것을 안다. 구 씨는 염미정의 이 말에 위로가 된다. 시청자인 나도 위로가 되었다. 정말 그랬다.       


   



마음에 화가 찰 때가 있다. 대부분 화는 참다 보면 다른 마음들에 희석이 되어 희미해지기도 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준비 없이 펀치를 맞았을 때는 쉽게 잊히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억울함이 치밀기도 한다. 원인과 상관없이 말이다. 마음의 순발력이 부족한 사람은 대꾸 한마디 못하고 당한? 꼴이 됐을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어느 날 진상민원이 사무실에 와서 말도 안 되는 억측을 늘어놓으며 난동을 부리고 간 날 있었다. 나는 같이 싸울 수도 없는 입장이었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그녀 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얼른 그녀를 내보낼 생각으로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었다. 그 진상민원은 돌아갔지만 사과할 일이 아니었는데 사과를 한 나는 분했고 억울하여 화가 오래갔다.      


'그때 내가 왜 한 마디도 못 하고 당하고만 있었을까!'(마음에 순발력이 딸려서 그랬어.)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왜 설명을 못 했을까!'(사실 그럴 틈도 없었잖아. 순간이었잖아.)      


그런 마음은 사뭇 오래갔다. 하루 중 수시로 그때 그 상황이 올라왔다. 일 하다가도 불쑥, 밥 먹을 때도 불쑥, 자기 전에도 불쑥. 그렇게 화가 쌓여갔는데, 결국 나는 그 상황이 화가 난 것을 벗어나 그런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게 만드는 탄력 없는 내 마음으로 화가 옮겨졌다. 특히 아침에 양치질할 때 생각나는 건 정말 못 참았다.

"나쁜 X, 미친 X" 이런 상스러운 욕들이 내 입에서 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추함을 깨닫고 놀라기도 했다.


그러다가 염미정의 그 대사 한마디에 다 용서가 된 것이다. 거짓말처럼 마음이 씻겨졌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다들 그러고 사는구나.' 우선은 이런 마음이 먼저 들면서 위안이 되었고

'그래, 욕 좀 하면 어때, 나도 사람이잖아. 그런 상황에서 누구든 그럴 수 있어.' 그러면서 나를 다독이게 되었고,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됐어. 이제 그만하면 되지 뭐. 괜찮아.'(끄덕끄덕) 그러면서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우선 내가 나를 이해하게 되니 나에 대한 화가 풀렸고, 이후 나를 화나게 만든 그런 상황들도 용서가 되었다.


     



드라마에서 이렇게 위안을 받기는 처음이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끈 이유가 아마 많은 염미정들이 나와 같은 위안과 위로를 받았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이 땅의 모든 염미정들에게 힘내라고 말하고 싶다. 더불어 나에게도.



- 2024.01.13. 체칠리아정


일러스트_욘욘


매거진의 이전글 AI에게 위로받는 시대가 올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