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씨 유튜브를 손재주가 좋은 사촌 동생이 보더니 이모(순자 씨)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며 보석자수를 보내왔다. 선물은 좋은데 순자 씨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해도 며칠은 꼬박 힘들게 해야 하는 작품이었다. 하고 나서도 몸살이 날 것이다.
순자 씨는 미리 몸살이 났다. 조카가 보내 줬으니 하기는 해야 할 건데 걱정이 몸에 뿌리를 내려 아픈 것이다.(물론 그간 그림을 너무 열심히 그린 것도 있었다.)
딸이 내년에 같이 쉬엄쉬엄 하자고 달래고 나서 걱정이 덜어졌다.
아마 순자 씨는 그 작품이 엄두가 안나기도 했겠지만 그 엄두를 못 내는 지금의 노화된 자신을 확인한 계기가 되어 아팠을 것이다. 그런 순자 씨를 보는 내내 딸은 마음이 아팠다.
육체가 늙는 것이지 정신이 늙는 것은 아니니 마음은 늘 이팔청춘이라는 말이 옳다. 그래서 딸은 순자 씨를 노인 대접보다 친구 같은 딸이 되고 싶다. 순자 씨 앞에서는 3인칭이라도 '노인'이라는 단어는 물론 '어르신'이라는 단어도 금지다. 그냥 '엄마' 아니면 '순자 씨'고 '그분' 또는 '그 사람'으로 대체한다. 아니면 이름으로 말한다.
순자 씨랑 같이 일했던 사람을 말하면
"아, 그 영순 씨?" 이렇게.
한 때는 "늙음도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했다. 인정함에서 오는 편안함이 있을 테니. 그래서 나이 먹어감을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어디 정답이 있나 싶다. 심리학도 따지고 보면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일 테고 결국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일 터, 이래라저래라 할 존재가 아니다.
여하튼 순자 씨는 그 문제의 보석자수를 1년 뒤로 미루고 나서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
순자 씨는 지금 쇼핑 중이라고 연락이 왔다. 어제 딸이 고급지게 고운 니트를 사드렸더니 그에 맞는 바지를 사러 간 모양이다. 딸은 또 아차, 싶은 것이다. 다음엔 세트로 선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