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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Oct 17. 2023

프롤로그 : 굳이 쓴 편지

내게 가장 다정하고 내가 제일 시샘하는 나의 친구에게 

어느 날 시샘이 다정에게 물었다.
“낭만이 무엇이라 생각해?” 

다정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하다가
“굳이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특별한 날은 아니지만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굳이 산 꽃, 무거우니 넣지말까 고민하다가 가방에 굳이 넣은 책을 햇빛 적당한 벤치에 앉아 읽는 시간, 그걸 꼭 말로 다 해야하나 싶은 주저함이 있을 때에 그럼에도 굳이 꺼낸 고맙다는 고백 같은 거. 귀찮거나 쑥스럽거나 딱히 필요하지 않아도 나와 타인을 향한 다정함이 이유가 되어 굳이 하고마는 것에서 낭만을 느낀다고 이야기했다. 


시샘은 다정의 답을 듣더니 흥미롭다는 미소를 머금은채,

“나는 ‘굳이 하지 않는 것’인데!”라고 말했다. 


그 예로는 굳이 똑바로 쓰지 않은, 글씨를 거꾸로 쓴 편지를 들었다. 시샘은 좋아하는 이에게 편지를 쓸 때 글씨를 좌우반전으로 뒤집어 쓴다. 그건 분명 쓸 때도, 읽을 때도 불편하지만, 익숙하지 않기에 천천히 쓰고, 오래 읽는 낭만이 있다. 굳이 전철을 타지 않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걷는 길도 그렇다. 편하고 당연한 선택을 굳이 하지 않고, 조금 낯설게 그 순간을 천천히 누리는 것이 낭만이라 했다. 


굳이 하는 것과 굳이 하지 않는 것. 낭만에 대한 다정과 시샘의 묘사 자체는 서로 상반되지만, 사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의 낭만에는 ‘굳이'가 있다. 그렇게 다르고도 비슷한 시샘과 다정이 말로 해도 될 것을 굳이 말로 다 하지 않고, 굳이 서로에게 편지를 전하기로 했다. 


서로에게 굳이 쓴 22편의 편지가 1년 동안 차곡차곡 쌓였다.

두 친구의 낭만적인 놀이였다. 


이 편지들은 다정과 시샘이 서로의 친구가 된 뒤 따로 또 함께 채운 소중한 시절의 기록이기도 하다. 친구에게 기꺼이 속내를 내어 보이는 모든 장의 편지에는 결코 대단치 않은 두 여자의 짠내 나도록 허덕이는, 그렇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20대와 30대가 담겼다. 그리고 그 시간 내내 서로를 지탱해 준 우정이 스며있다. 완벽한 우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우정이 그러하듯 서로를 향한 비교와 질투로 흔들린다. 둘이 처음 친구가 된 스무 살에는 같은 대학에서 비슷한 모양의 일상을 살았지만 30대가 되니 많은 게 변했다. 자유로운 싱글인 시샘과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다정, 도시에서 활발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시샘과 시골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다정. 나와 다른 너의 모양에 질투를 품고 의기소침해진 날들이 있다. 

이쯤 되면 '아무리 친했어도 서로 사는 모양이 달라지면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흔한 우정의 서사에 잡아먹힐만도 한데 다행히 이 우정은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시샘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여전히 서로에게 가장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 우정의 생존기 역시 이 편지 속에 담겼다. 


시샘과 다정이 낭만에 젖어 굳이 편지를 써내기는 했는데 이 편지를 굳이 읽을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는 궁금한 부분이다. 두 여자의 내밀한 편지를 들춰보는 시간 동안, 시샘과 다정이 주고받은 지지와 격려가 읽는 이의 하루에도 따스히 스미길, 그렇게 그의 하루도 그만의 낭만에 한 걸음 가까워지길 바래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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