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샘이 다정에게
다정아, 나 회사 그만뒀을 때 기억나?
그때 한 달 동안 그만둘지, 계속 다닐지 엄청나게 고민했잖아. 사장님과 면담을 여러 번 했는데, 나는 고민의 순간마다 너한테 전화했었어. 처음 전화했을 땐 이런 얘기를 했지. “다정아, 나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아. 여기서는 더 이상 발전이 없어. 이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래.” 너는 이 얘길 듣고 곧바로 나한테 회사를 나가도 잘할 거라며 응원해 줬지. 그런데 일주일 뒤에 내가 또 전화해서 그랬잖아. 다시 회사를 다녀야겠다고. “다정아, 아직 확실히 좋아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성급하게 그만두는 건 내 삶에 책임감이 없는 것 같아”라면서. 그때도 너는 바로 그만두지 않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말해줬었어. 너의 격려에 안심하며, 나는 다시 회사생활을 열심히 해보겠다며 전화를 끊었어. 그리고 일주일 뒤, 나는 또 너에게 전화해서 말했지. “다정아, 나 회사 그만뒀어.” 그날,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은 안 나. 그런데 너는 분명 잘했다고 했을 거야. 너는 맨날 다 잘했다고 하니까.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둔다는 친구에게 철이 없다고 할 수도 있고, 다시 회사를 다니겠다는 친구에게 이직에 대한 조언을 해줄 수도 있잖아. 혹은 맨날 물어봐 놓고는 제멋대로 결정하는 변덕스러운 나에게 ‘답정너’냐며 짜증을 낼 수도 있었을 텐데 너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어. 그저 열심히 들어주고, 내가 하는 선택을 응원해 줬지. 내가 고민하고 결정했다면 어떤 선택이든 그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을 거라고 믿어주면서.
근데 나 너의 그 믿음이 고마우면서도, 아쉬웠어.
넌 내가 이런 생각했을 줄 몰랐겠지?
왜 아쉬웠냐면, 그때 격려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었거든. 발전 가능성이 없는 회사에 다니는 게 맞는 건지,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는 게 맞는 건지 정답을 알고 싶었어. 또 내가 생각해도 좋아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면서 하겠다는 게 허무맹랑해서, 이게 틀린 선택이라면 누구든 ‘정신 차리라’며 말려주기를 바랐어. 나는 그런 조언이 필요했나 봐. 물론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해. 세상에 100% 확실한 정답이 어디 있겠어. 더군다나 나도 모르는 내 인생에 대해 누가 어떤 말을 해줄 수 있겠어. 그럼에도 부단히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였던 건 나조차 나를 믿을 수 없어서 여러 사람들이 맞다고 하는 말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몰라. 네가 해주는 다정한 격려보다 현실적인 조언들이 더 믿음직해 보였을 수도 있고.
나에게는 첫 직장의 첫 퇴사였고 사뭇 퇴사를 고려하게 된 것도 갑작스러웠던 터라, 한 달 동안 회사와 협의하고 조율하는 시간을 보내며 내가 하는 선택이 맞는지 아주 혼란스러웠어. 모르고 놓치고 있는 게 있진 않을까 걱정돼서, 하루는 유튜브에 ‘퇴사 준비’를 검색해 봤어. 그리고 그때 그토록 필요했던 현실적인 조언이 담긴 좋은 영상을 보게 됐어. [제대로 퇴사하는 법]이라는 영상이었는데, 문답식으로 고민 상담을 해주는 강연 유튜브였어. 퇴사를 고민 중인 한 사람의 사연에 대해 두 분의 강연자가 답변해 주는 형식이었지.
“외벌이 다둥이 아빠인데, 아무런 준비 없이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질문자의 말에 강연자분이 단호하게 대답하셨지.
“혼나야 해요. 아빠가 그만두면 어떻게 해요.
플랜 B, 플랜 C를 만들어 놓고 해야죠!”
두 분의 강연자가 퇴사에 있어 가장 강조한 것은 백업플랜과 금전적 여유였어. 퇴사 계획과 목표는 구체적이어야 하며, 퇴사 전에 양다리를 걸치며 하고 싶은 일을 미리 경험해 보는 게 좋다고 하셨지. 그리고 무엇보다 퇴사 후의 삶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여유 자금과 수입원을 준비해 두는 것을 강조하셨어. 금전적 압박을 느끼면 불안해지고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집중력이 흐려지기 쉽다고 얘기하셨는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더라. 퇴사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겪는 문제가 ‘불안감’ 일 텐데, 두 분의 조언은 불안해하느라 소모되는 인지 자원을 최대한 줄이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성취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였다고 생각해.
내가 그만두겠다고 했다가, 갑자기 다시 다니겠다며 말을 바꾼 이유도 이 영상을 봤기 때문이었어. 특히, “아이 아빠가 그만두면 어떻게 해요!”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지. 나는 질문자처럼 아이가 있진 않지만, 내가 가진 꿈이 혼자서 자립하지 못하는 연약한 아이처럼 느껴졌거든. 그리고 나는 이 작은 꿈의 부양자라는 생각이 들었어. 퇴사 후 취미로 좋아하던 그림책을 가지고 일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사실 몇 번 그림책 모임을 열어본 게 내가 해본 시도의 전부인걸. 모임 운영만으로는 안정적인 수입을 가질 수 없고, 그렇다고 퇴직금 외에 금전적 여유가 있던 것도 아니었어. 이런 불안정한 상황이라면 조언처럼 당장 퇴사하는 것보다는 회사를 좀 더 다니면서 다음 스텝을 준비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 사실 퇴사를 준비하며 나는 막연히 ‘꿈’에 기댔던 것 같아. 꿈이 알아서 이뤄지고 결과물을 내서 회사를 그만두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기를 바랐지. 내가 꿈을 이루는 주체라기보다는 꿈의 환상에 젖어있던 게 맞아. 그런데 ‘내가 내 꿈의 부양자’라고 생각하니까 머리가 차갑게 식으면서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계산을 하게 되는 거야. 내가 꿈을 부양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포기하며, 무엇을 노력해야 할지. 그리고 결정했지. 일단 회사를 계속 다녀야겠다고.
그런데 이렇게 훌륭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들을 후에 나의 선택은 결국 퇴사였던 걸 너는 알잖아. 아무리 마음먹어도 나는 이미 지쳐 있었고, 회사와 상사의 태도에 낙심이 되어서 일을 계속해 나갈 힘이 나지 않았어. 생전 잔병치레도 없이 건강하던 나인데, 퇴사로 이야기가 오가는 한 달 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눈에는 다래끼가 나고 위염이 심해 병원에 다녔지. 아무리 훌륭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받아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때에는 무용지물이 되더라고.
그림책 《가만히 들어주었어》서 주인공인 테일러는 멋지게 블록을 쌓는데, 난데없이 날아온 새들 때문에 모든 게 무너지는 걸 경험해. 슬퍼하는 아이의 곁으로 여러 동물이 다가오는데, 저마다 자기 만의 방법으로 아이를 위로해. 닭은 테일러에게 뭐가 속상한지 말해보라고 하고, 곰은 소리를 질러서 속상한 기분을 날려 버리라고 하지. 코끼리는 원래 쌓았던 블록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말해주면 자신이 고쳐주겠다며 문제를 해결해서 도움을 주려고도 하지. (닭과 곰은 F, 코끼리는 T 같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테일러는 말하기도 싫고, 소리를 지르기도 싫고, 원래 어떤 모양이었는지 떠올리기조차 싫어해. 그 후로 여러 동물이 와서 여러 조언을 들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지.
아이가 가만히 있는 모습이 내 모습처럼 느껴졌어.
뭐든 해야 하는 걸 아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고 또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잖아.
퇴사하고 몇 개월은 퇴직금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여행을 다니고, 여러 가지 수업을 들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꽤 행복했는데, 곧 대책 없이 시작한 퇴사 후의 삶이 나를 조여오기 시작했어. 몇 개월 수업을 들었다고 내세울 만한 특기가 될 수 없었고, 특별한 재주도 경험도 없던 나는 크고 작은 알바에서 몇 번이고 떨어졌지. 돈은 점점 바닥나는데, 나는 그만둘 때의 의욕과 달리 무기력하고 우울해서 많은 날을 그냥 누워있었어. 보통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패배자라거나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지 않나.
그렇게 오래 누워있다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할 때마다 너네 집으로 놀러 갔었어. 2박 3일, 3박 4일씩. 나처럼 남편과 아기가 있는 집으로 며칠씩 놀러 가는 애도 드물 거야. 우리는 만나면 온종일 수다만 떨잖아.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도 안 한 채로 아침을 먹으며 대화하고, 그다음엔 커피를 먹으면서, 그다음엔 점심을 간단히 챙겨 먹으면서, 근처에 예쁜 카페에 가서, 저녁을 먹으면서, 다 먹고 나서는 씻고 다시 소파에 앉아서. 그렇게 며칠 내내 얘기를 나눴었어.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살았었는지를 얘기했을 거야. 너는 그때마다 내 모든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지. 그리고 늘 나에게 말해줬어. “수지야 충분히 잘하고 있어.” 며칠을 누웠다가 가끔 일어나서 한 조금의 일을 보고 애썼다고 격려해주고, 고작 그 몇 가지를 하고서 다시 뻗어버린 나에게 ‘쉬는 것도 너에게 분명 필요한 시간‘이라고 얘기해 줬잖아. 너는 참 한결같아. 또 다 잘했다고 그러잖아.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깜깜한 시간 속에서 구출해 낸 건,
멋진 조언이 아니라 나를 믿고 기다려 주는 너의 다정함이었어.
그림책에서 테일러에게 다가와서 해준 동물들의 조언은 저마다 이유가 있고, 좋은 방법들이었다고 생각해. 다만, 닭과 곰과 코끼리 그리고 하이에나, 타조, 캥거루와 뱀은 테일러가 자신의 조언대로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그 곁을 떠나버려. 이해는 가. 뻔히 답이 보이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답답하잖아. 그런데 토끼는 아이의 곁으로 다가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계속 옆에 있어. 옆에 딱 붙어서 온기만을 주면서. 충분한 시간이 지나자 테일러는 먼저 토끼에게 “나랑 같이 있어 줄래?”하고 물어. 그러고는 그 옆에서 소리도 질러보고, 이전의 시간을 기억해 보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숨기도 하며 자신이 힘들었던 시간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소하지. 이 시간도 충분히 보내서 때가 되니 테일러는 다시 무너졌던 블록을 다시 쌓아보겠다고 이야기해. 테일러를 다시 일으킨 건 토끼의 다정함이었지. 마치 네가 나에게 해준 것처럼 말이야.
네가 나를 기다려 주었듯이,
사실 나도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어.
퇴사 후 돈도 없고, 알바조차 떨어지고, 꿈이 정확히 뭔지도, 아침에 일어나면 뭘 해야 할 지조차 모르겠는 게 내 현실이었어. 쉽게 무기력해지고 우울해하고, 자주 하던 일들을 멈췄었지. 그래도 알고 있었어. 날마다 옥죄이는 불안이 새롭게 나아가려는 내 용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당장 결과물이 있진 않지만 ‘그림책’과 관련된 일을 찾아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는 것과 설레는 방향을 찾고 나니 알바에 떨어지는 게 그렇게까지 속상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말이야.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것이 나답게 살기 위한 희망의 몸부림이었다는 것까지도.
특히 이 과정을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나, 내가 좋아지고 있었어. 살면서 처음으로.
분명 그랬는데, 불안한 순간마다 조급한 마음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더라. 다른 사람들과 세상의 기준에 맞춰 나를 비교해 보면 내가 아주 느리고, 부족하고, 초라하게 보였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럴 때마다 나는 너를 생각해. 내가 가진 모습 그대로, 나의 속도를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기다려 주는 너를 떠올려. 그러면 내가 나를 어떻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그 기다림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같이 생각나거든. 나도 내가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스스로 다시 일어설 때까지 내 마음을 가만히 들어줘. 지금은 자주 멈추더라도 언제든 나도 나의 때가 되면 테일러처럼 “다시 해볼 거야”라고 힘을 낼 거라고 믿으면서. 지나고 나니 다 너를 통해 배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게 항상 고마웠어.
이런 생각하는 줄도 몰랐지?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가만히 들어주었어≫
코리 도어펠드(글/그림), 신혜은(옮긴이), 북뱅크(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