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이 달라졌을 뿐
의자로 태어나기 이전에
의자는 나무였다. 의자가 죽을 때까지
의자로만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나무였던 것이 의자가 되었고,
의자였던 것이 땔감이 되거나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이름이 바뀌고
역할이 바뀌어도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쓸모가 달라졌을 뿐이다.
뽀송뽀송하던 수건도
언젠가는 해지고 늘어진다.
처음에는 얼굴을 닦던 수건이다가
어느새 발 닦는 수건이 되고
마침내는 걸레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수건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쓸모가 없어졌다고 말하기엔
수건은 여전히 무언가를 닦고 있다.
달라진 건 쓸모가 아니라 쓰임이다.
우리는 종종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로
자신의 가치를 재단한다.
의자로 쓰일 때는 의미 있고
나무였던 시간은 없었던 일처럼
얼굴을 닦는 수건일 때는 괜찮고
걸레가 되면 끝난 것처럼.
doing에 오래 머문다.
무엇을 해내고 있는지,
얼마나 쓸모 있어 보이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하지만 삶에는
being의 시간이 더 많다.
아무 역할도 맡지 않아도 되는 시간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의자는
사람을 앉히든
먼지를 얹히든
부서져 나무로 돌아가든
그저 그 자리에서
자기 몫의 시간을 산다.
수건은
얼굴을 닦든
발을 닦든
바닥을 닦든
그저 수건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삶도
나 자신도 그렇다.
지금 내가
무언가를 잘하고 있지 않더라도
쓸모 있어 보이지 않더라도
눈에 띄는 역할이 없더라도
그건 내가
쓸모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쓰임이 달라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 쓰임에만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보다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조금 더 감사할 수 있다면.
being에 오롯이 잘 머물러야 지치지 않고
오히려 doing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