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감각을 따라가 보려 한다 / 꿈보다 해몽
가마솥에 전복죽이 한가득 끓고 있었다.
친정엄마가 만든 죽이었다. 김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고, 그 장면이 이상하리만큼 또렷했다.
엄마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오래 끓이고, 오래 참고, 오래 마음을 쓰는 사람. 몸이 허할까 봐, 기운이 달릴까 봐, 딸을 생각하며 푹 고아냈을 것이다.
사랑이 부족할 리 없는 죽이었다.
그런데 나는 한 숟가락을 떠먹고 고개를 갸웃했다.
맛이 없었다.
꿈인데도 감정이 생생했다.
고마웠다. 그런데 동시에 어색했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하는 마음과 “그런데 이 맛이 아니야.”라는 마음이 겹쳐 올라왔다.
미안함이 스쳤다.
엄마의 사랑은 충분했고 부족함 없이 곱게 자랐다
아니 어쩌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 안에 있으면 나는 자연스럽게 아이가 된다.
보호받는 자리,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그 자리는 안전했지만 동시에 아주 익숙했다.
그런데 꿈속의 나는 거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전복을 골라냈다.
그리고 다시 내방식으로 끓이려 시도했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엄마의 죽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대로 삼키지도 않았다.
필요한 것은 남기고 나머지는 덜어냈다.
그건 반항이 아니었다. 조금은 늦은 분리 같았다.
사랑을 거절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방식을 다시 맞추는 일.
“엄마의 방식은 고마워. 그런데 이제는 내 몸에 맞는 온도로 끓여볼게.”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요즘의 나도 그렇다. 누군가의 기준에 맞게 잘하고 있는지 묻기보다 내가 안전한지, 내 리듬이 편안한지를 더 자주 묻는다. 익숙한 보호 안에 머무는 대신, 조금 서툴더라도 내 감각을 따라가 보려 한다.
그 꿈은 조용히 알려주었다.
회복은 정성의 양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
치유는 많이가 아니라 맞게에서 시작된다는 것.
나는 더 이상 누군가가 끓여준 죽만 먹는 아이가 아니다.
고마움을 품은 채로도 나에게 맞는 레시피를 다시 쓸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돌봄은
한가득이 아니라 내 온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