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고요한 정적이 그리운 당신이라면
이우환 ‘선으로부터’는 2년 전 과천 현대 미술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진한 붓 자국으로 시작해 곧 끝을 향해 달려가는, 흐려지고 또 반복되는 회화 작품 '선으로부터'. 그때 미술관 벽면에 쓰여있던 글귀는 마치 작품과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나의 기억 속에 선명히 각인됐다.
'시작과 끝은 하나다. … 끝이 없는 시작도 시작 없는 (무의미한)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작과 끝의 무한한 순환은 ‘영원’의 개념을 완성한다’
현대 미술에 문외한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선들과 점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생각에 잠기면서 예술이 던지는 물음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나는 그 이후로도 에너지의 흐름과도 같아 보이는 이 파란 선과 점들을 ‘시작과 소멸, 영원’ 이란 말들과 함께 기억하게 되었다.
이우환 공간은 부산 현대미술관에 위치한 곳으로 부산에 본가를 둔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라며 소개해준 반가운 장소였다. 미술관 본관을 거쳐 평평한 앞뜰을 따라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공간이 나타난다. 이 곳은 일본 나오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생긴 이우환의 개인 미술관이다. 작품의 설치는 물론이고 건축의 기본 설계와 디자인까지 이우환 선생님께서 직접 맡으셨다고 하니 이 곳은 그의 애정까지 함께 담겨있는 장소일 것이다.
이우환 공간에서는 ‘선으로부터’ 외에도 ‘관계항’이란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었다. 그는 커다란 바윗돌과 그 구성 요소로부터 만들어진 인공물을 빌려와 배치시킨 뒤 서로 관계를 맺어주는 방식으로 예술을 완성시킨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 ‘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대하여’ 목차에 포함된 내용을 인용하고 싶다.
“…… 즉 현실의 어떤 측면을 작품에 포함시키고 어떤 측면을 배제할지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니체가 알고 있었듯이, 현실 자체는 무한하며 절대 예술로 전부를 나타낼 수가 없다. 반 고흐가 프로방스 화가들 중에서도 독특했던 것은 그가 중요하다고 느껴서 선택했던 것이 독특했기 때문이다. (생략) 사건을 묘사하는 데에는 저널리스트보다 사실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저널리스트의 꼼꼼한 모눈종이 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진실을 드러내는 시인과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진 각각의 큰 바윗돌, 그리고 그 구성 요소로 만들어진 인공물은 시인 이우환 작가가 그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예술 언어다. 그가 조각한 생각의 정수는 눈으로 보이는 하나의 형태로 미니멀하게 압축되었으며, 작품은 본질만을 남긴 표현이 되어 공간을 묵직하게 장악한다. ‘관계항’이 존재하는 방을 서성이다 보면 공간의 빈 여백까지 작품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되면서 이우환 작가와 그의 작품이 가지는 영향력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이우환 공간에서는 회화 14점, 조각 7점, 외부 조각 3점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재생해주는 작은 방을 마련해두었으므로 이 영상의 내용에 집중해보자. 오디오 클립을 통해서도 작품 해설을 청취해 볼 수 있으니 이어폰을 함께 챙겨가면 도움이 된다. 작품을 모두 감상하고 내려가는 길,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관계항’ 이 그제야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작품이 공간을 압도하는 이우환 공간은 비어있으면서도 가득 차있는 철학의 장소이다. 발걸음만이 소리를 울리는 미술관의 고요한 정적이 그리운 이들이라면 이 곳에 방문해 작품 속으로 침잠해보자.
1 일본 나오시마에 이은 세계 두번째의 이우환 개인 미술관
2 이우환 선생님이 직접 건축의 기본 설계와 디자인을 한 공간
3 조각 작품 <관계항>을 만날 수 있는 장소
부산시립미술관 별관 이우환 공간
0507-1404-2602
@ufanlee
*코로나19로 인해 사전예약제로 운영중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2년 전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촬영한 작품의 사진을 함께 게시했습니다. 부산 이우환 공간의 2층은 촬영이 금지된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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