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습작노트

주말 아침의 상념

by 독당근


우연히 시작하게 된 그림모임이 자리를 잡았다.

가까운 거주지에 사는 사람들끼리 만든 모임이라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여자 세 명이 전부인 소규모 모임인 것도, 서로를 배려하며 집중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까지도 모두 좋다. 소중한 주말 아침을 복작복작 잡소음으로 보내는 건 큰 손해이니까. 이런 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을 보는 눈이 생겼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모임은 매주 토요일 이른 아침에 시작된다. 첫 모임부터 며칠간은 우리 집 근처 커피빈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지난주는 옥수동의 작은 카페에서, 그리고 이번 주는 이태원 맥심 플랜트에서 그림을 그렸다. 세 곳의 공통점은 창이 커서 햇살이 잘 드는 것이다. 유독 주말의 햇살은 더욱 환하고 사랑스럽다. 우리는 한 주동안 잘 지냈는지 간단히 안부를 묻고, 오늘은 무엇을 그릴 건지 서로 물어본 뒤 곧바로 각자의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모임장님은 매번 새로운 도구와 종이를 가져오셔서 오늘은 어떤 도구로 그림을 그리실지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다양한 색의 색연필과 펜, 귀여운 미니 팔레트 등을 테이블에 차르르 펼치면 디지털 드로잉만 하는 나도 '손그림을 그려볼까?' 하며 솔깃해진다. 다른 한 분은 주로 연필로 그림을 그리시는데 망설임 없이 과감하게 슥슥 그려내시는 모습이 왠지 쿨 해 보인다. 나는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며 주로 포근하고 따뜻한 색감을 이용한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린다. 그런 그림들이 나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준다. 왜 사람들이 미술치료를 하는지 알 것 같다.

모임 시간이 끝나갈 즈음 서로 그린 그림을 구경하며 감상평을 나눈다. 감상평이라 말하니 거창해 보이는데 서로의 그림을 보며 느낀 소감을 간단히 말해주는 것이다. 전문적인 피드백은 아니지만 그림에 추가하면 좋을 것이나 빼면 좋을 것을 조심스레 알려주시는데 이는 그림의 질을 높이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우와 멋져요' , '귀여워요' , '잘 그리셨어요'라며 소소한 칭찬을 주고받는다. 쑥스럽긴 하지만 뿌듯한 순간이다. 작은 성취로 시작하는 토요일 아침은 주말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준다. 물론 토요일 낮 12시라는 사실부터 마음을 부풀게 하는데 충분하지만.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다가, 방금까지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던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럴 땐 내가 마치 일러스트 작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순간만큼은 카페에서 작업을 하는 프리랜서 작가인 것이다. 매번 야금야금 그림을 배우고 그만두기를 반복하며 그림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못해 왔기에 이런 상상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상상은 이전처럼 오래 지속되진 않는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이런 상상을 자주 했으나(그림을 그릴 때가 아니더라도), 지금은 학교에서 일하지 않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가 더 어렵다. 그리고 더 이상 그것이 아쉽지 않다.

매번 주말이 올 때마다 안절부절못했던 지난날들을 돌아본다.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로 얻은 지금의 주말은 더욱 달콤하게 느껴진다. 물론 모든 직장인의 숙명처럼 주말은 늘 아쉽게 지나간다. 하지만 더 이상 일요일 밤 무거운 자책감에 눌려 잠들고, 다음날 축 처진 어깨로 출근길을 나서지 않는다. 이건 단순히 현실에 적응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본업과 달리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은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지속할 수 없다. '반드시'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 당장 완벽한 그림을, 글을 내놓지 않아도 된다.


주중에 직장에서 보내는 나의 삶도, 주말에 새로운 장소에서 보내는 나의 삶도 모두 소중한 나만의 삶이다. 무겁고 진중한 것만이 인생이라 할 수 없고, 가볍고 즐거운 것만이 인생이라 보지 않는다. 일상을 보내는 것이 이렇게 간단하지 않을 줄이야!

아직 진행 중이지만, 더 많은 시행착오가 남았지만
지금 이 속도와 방향이 나는 꽤 마음에 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