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났다면 좋았겠지만

by 독당근


"오늘 같이 비가 많이 오는 날은 그냥 집에 가고 싶어 지네요."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직장 동료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그 말에 그냥 웃으며 손을 씻다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기껏 한다는 말이,

"그러게요. 비가 많이 오네요." 라니.


분명 나는 "저도 집에 가고 싶어요" 혹은 "갈 때 저도 같이 나가요" 라며 넉살 좋게 맞장구치고 싶었다. 그렇게 했더라면 우리는 함께 '하하하'하고 웃어버리고 상대 쪽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를 꺼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은 아주 이상하다고 단정 짓긴 어렵지만 대화를 이어나가기엔 영 부족한 말이었다.

이어서 바로 만회할 수 있는 말이 생각났더라면 좋았겠지만 그 타이밍마저 놓쳐버리고 말았다. 결국 난 후다닥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남겨진 동료의 표정은 차마 확인하지 못했다.





가깝지 않은 관계의 누군가가 예기치 못하게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 길고양이처럼 경계를 하게 된다. 어렸을 땐 아주 능숙하게 담벼락 너머로 쌩하고 도망가버리곤 했다. 지금은 이러한 관심과 친절은 일종의 매너이고 감사한 일임을 알 정도의 나이가 되었으니 나 역시 그에 부응하는 표현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오늘처럼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떤 이에게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노력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자신의 성향이나 기질과 상반될수록 그 스트레스는 더욱 가중된다. 그런 본성을 거스르는 일을 큰 마음먹고 애써 해내고 나면 뜨거운 성취감을 느끼기보다 마음이 급속도로 차갑게 식어버린다.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일인극을 마친 광대가 되어 관객의 동정 어린 눈빛을 받는 것 같다. 차라리 야유를 받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한 때는 이러한 내 모습에 좌절감을 느꼈다. 마치 내가 고쳐야 할 큰 결함이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기가 죽어버린 거다. 그런 내 모습을 오랜 기간 애써 외면하기도 했었고, 패기 있게 부딪혀 극복하려고도 해봤으나 둘 다 큰 수확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지금은 이런 나인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익숙해진 건 아니지만 지금 나에겐 이 정도가 최선임을 인정한다. 어쩔 수 없다고 조금은 뻔뻔스럽게 잡아뗀다.

타고난 넉살이나 붙임성이 있었다면 살아가기가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누군가와 어색한 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갈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이렇게 늦은 밤까지 오늘 일을 되짚으며 잡념에 빠지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더 일찍 깊은 잠에 들 수 있었겠지. 괴로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꽤 성가 신 일이다.


하지만 고민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 이런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렇게 된다면 여전히 애써야 하는 나라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