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쌤 저 오늘 세시쯤 학교 끝나는데 잠깐 찾아봬도 될까요?] 졸업생이 찾아오는 건 늘 기분 좋은 일이다. 지금까지 나를 기억하고 있고 또 필요로 한다는 의미니까. 내가 일하는 중학교는 아파트 단지에 둘러 쌓여있고, 대부분의 학생이 바로 옆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학생의 집과 고등학교 모두 우리 학교와 가까워 오가는데 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소중한 시간과 마음을 내어 왔다는 그 자체가 고맙다.
졸업을 하고 나서도 자주 찾아오는 학생이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급격하게 심리가 불안정해져 힘들어하던 아이여서 마음이 많이 갔다. 하지만 문을 열고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모습에 크게 한시름 덜었다. 직업상 학생의 마음이 힘들 때 만나기에 졸업생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다. ‘고등학교에 적응을 하기 힘든가?’, ‘무슨 큰일이 생긴 건가?’, ‘내가 놓쳤던 문제가 있었나?’와 같은 불안한 생각이 줄줄이 따라온다.
학교는 일반 회사와는 다르게 일의 권한이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계속 연결되어 있다. 학적은 고등학교로 넘어갔으나 여전히 내 학생임은 변치 않는다. 온실에 보호하고 잘 가꾸어 놓은 식물을 다른 땅에 심는다고 해서 어떻게 자라나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다. 물론 길에서 보고 모른 척하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학생이 있다면 여전히 내가 그 앞에 존재해야 한다.
학생은 쫑알쫑알 아기 새처럼 우리가 만나지 않은 사이에 있었던 많은 일과 고민거리들, 읽고 있는 책, 키우는 고양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마음이 힘들 때 키우기 시작한 고양이가 지금까지 큰 힘이 되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선생님 혹시 지난번에 마셨던 핫초코 또 마실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그런 조심스러운 태도가 귀여워 싱긋 웃게 되었다. “물론이지”라고 하며 물을 끓이는데 마침 새로 부임하신 교장선생님의 옛 동료가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학교로 보내준 크림 번이 눈에 띄어 함께 내주었다. “와 - 기분이 너무 좋아요.”
학생은 정말 맛있다면서 감탄을 연신 하며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도 슬슬 일을 마무리하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학생이 보드게임이 있는 쪽을 바라보더니 병원에서 했던 기억이 난다며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난 보드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다 같이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참여하는 정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머리를 써야 하는 활동은 쉴 때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학생의 표정을 보니 왠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잠깐 해볼까?” 그러자 학생은 조금은 놀란 듯 기뻐하며 말했다.“정말요? 저랑 이렇게 보드게임도 해주시고, 직업정신이 투철하시네요.” 학생의 태도에는 어떤 불손함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오히려 긍정적인 쪽에 가까웠다) 왠지 그 말이 마음에 턱 걸렸다. ‘내 호의가 너무 인위적이었나?’ 분명 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다.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한 건 아니기에 그런 태도가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와 동시에 나의 성의를 몰라주는 학생에게 섭섭해졌다.집에 와서도 그 말이 계속 마음속을 맴돌았다. 나는 태블릿을 켜 ‘직업정신’을 국어사전에 검색해보았다.‘직업정신’ 자기가 속해 있는 직장에서 맡은 일을 정성스럽게 잘 수행하려는 마음가짐 곰곰이 생각해보면 학생과 인간 대 인간으로도 만나지만 그 이전에 상담교사 대 학생으로 만난다. 직업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만 학생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하고 싶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라는 마음이었으니 학생의 말대로 나는 직업정신이 투철한 게 맞았다. 그렇다고 직업정신을 위해 모든 선생님이 억지로 보드게임을 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보드게임을 잘하지 못하는 탓에 두 판이 허무하게 빨리 끝나버렸다. 그런 시시한 게임을 하고도 학생의 표정은 가기 전까지도 마냥 밝았다. “오늘 너무 기분이 좋아서 가는 길에 꼭 영상을 찍어야겠어요!”학생의 카메라에는 무엇이 담길까? 가을이 성큼 다가온 걸 알리는 높고 푸른 하늘, 얼마 전까지 비가 많이 내린 덕에 풍성한 잎을 자랑하는 나무, 만약 한강 쪽으로 간다면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을 담을 수 있을 거다. 무엇이 되었든 다정하고 따뜻한 것으로 가득 찼으면 한다. 학생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은 나의 직업정신에서 비롯되었다.나는 학생에게는 좋은 사람이기보다 좋은 선생님이고 싶다.그리고 다가올 추운 겨울날 더 생각나는 선생님이면 더없이 좋겠다.
보드게임은 잘 못하지만 핫초코는 맛있게 타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