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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당근 Feb 17. 2021

내가 있어야 할 곳

 신학년 집중 준비기간으로 개학을 앞두고 잠깐 출근을 했다. 눈은 더 이상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지난밤 운동장이 새하얗게 덮일 정도로 많이 왔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눈이겠지. 곧 3월이고, 아이들이 오니까.

 방학 동안 내 직업을 잊고 지냈다. 아이들도 새하얗게 잊었다. 하루 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정성 들여 고치고 또 고쳐서 완성한 글과 그림을 보며 뿌듯해하며 하루를 마쳤다. 그러다 문득 학교가 생각나면 '아차'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건 순간일 뿐이다.

 매일 유튜브를 보며 글을 멋지게 쓰는 작가가 되는 꿈을 꾸다가, 아기자기한 작업실을 가진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는 상상 했다. 내 마음은 붕- 떠서 자꾸만 떠날 궁리만 했다. 내 마음은 저어기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있다가, 푸른 바다가 잘 보이는 거제도 전원주택에 있다가, 도심 한가운데의 복층 오피스텔에도 있었다.

 그래도 양심이 찔렸는지 무리해서 비싼 심리학 강의를 신청했다. 평소 관심 있던 이론이기도 하고 교수님의 강의가 재밌기도 했지만 사실 내 본분을 잊지 않으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분명 내가 선택한 일임에도, 정말 간절했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피하고만 싶었다.

 글이나 그림은 망치게 되면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지' 하고 새롭게 다시 시작해도 되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상담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100명의 내담자를 죽여야 진정한 상담자가 된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나의 태도는 어쩌면 비겁한 것인지도 모른다.



 방학은 곧 끝난다. 나는 다시 나의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한다. 아이들을 마주해야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선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그 공간을 매일 출근해야 한다.

 오랜만에 가는 학교라 낯설 줄 알았는데 고요한 운동장과 학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3년 차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나는 오래도록 이 곳에서 나를 계속 의심하면서 공부하고, 아이들을 만나 상담을 하며 지내게 될 것이다. 가끔 도망갈 궁리를 하겠지만, 결국 이건 실패하게 될거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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