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사를 하게 될 수도 있어. 그러면 네 여행 일정도 바꿔야 할지 몰라."
갑자기 이사라니 또 여행 일정을 바꿔야 할 수도 있다니.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연달아 들으니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바네사의 슬픈 목소리와 무거운 공기가 집안을 감싼다. 어디선가 비상벨이 위잉 위잉 울리며 경고하는 듯했다.
요즘따라 부쩍 바네사의 표정이 어두웠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때 눈치를 챘어야 했고 어쩌면 한 번쯤 그녀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아니 물어봤어야 했다. 일이 없는 날에도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바네사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빴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붙잡고 물어보지 않았던 수많은 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저 브라질은 시스템이 좋지 않아 직접 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거라고 혼자 섣불리 단정 지었다. 어쩜 이렇게도 바보 같을까.
부엌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놀라서 다급히 가보니 바네사가 울고 있었다. 그녀는 나 때문에 편히 울지 못했다.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가 못 본 척 외면한 순간들 속에 혼자 힘들어했을 바네사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바네사에게 그제야 정확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여기는 집 값이 너무 비싸. 그리고 돈을 내면 자기들 마음대로 약속을 바꿔버려. 그래서 나는 리우로 이사를 가야 할 것 같아. 거기 사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해."
그녀에게 짐이 되었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항상 배낭여행, 영어와 스페인어 공부 따위의 배부른 고민을 떠들어 댈 때 ‘잘할 수 있을 거야’라며 용기를 주던 그녀는 혼자 자신의 현실에 맞서야 했다. 이미 내가 도착했을 때 그녀의 문제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바네사의 말에 당황스럽고 겁이 났다. 여행 일정을 바꾸는 것 정확히는 여행 일정이 늘어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여행 일정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사실 그 외에 어떤 선택지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로써 내 여행은 성큼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다.
원래 계획은 6개월간 바네사 집에 거주하며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를 배우고 중간중간 짬을 내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이곳저곳을 짧게 여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달 정도만 남미 일주를 할 예정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편을 좀 더 앞당길 수도 있었을 테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번거롭다는 거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벌써 왔어?’하고 묻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럼 나는 쉽게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퇴장은 절대 하고 싶지 않다.
"지구 반대편까지 온 마당에 두려울게 뭐람?"이라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이 넘는 배낭여행은 갑작스러웠다. 길어봐야 한 달 반 정도 여행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9월 초이고 여행을 시작하는 날은 4월 중순 즈음이니 네 달 반은 남미 어딘가를 홀로 전전해야 한다. 바네사는 여행사 투어를 제안했지만 이 역시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언어를 충분히 배우고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 여러 모로 좋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핑계 아래 어딘가 찜찜한 편안함을 누리려고 했던 나를 직면했다.
물론 브라질에서 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새롭고 들떠있는 기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왔다. '인생은 리허설이 없다!'라는 청춘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대사를 블로그에 타이핑을 하며 다음 스텝을 준비했다.
먼저 가장 무시할 수 없는 예산. 통장 잔고를 옆에 펼쳐두고 앞으로 가게 될 여행지들을 지도 위에 찍어보았다. 차근차근 이동비와 숙박비 그리고 식비 등을 하나씩 가늠해보려 하지만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나는 절대 엑셀로 여행 예산을 깔끔히 정리하는 류의 사람이 될 수 없을 거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다 덮어버렸다. "이 정도면 4개월은 여행할 수 있을 거야. 무조건 아껴 쓰면 어떻게든 되겠지"
손을 놓고 있다가도 이내 불안한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다른 여행자의 예산을 찾아보니 지금 내 수중에 있는 돈으론 조금 빠듯했다. 여행 중간에 돈이 떨어져 버리면 큰 낭패다. 물론 부모님의 도움으로 충당할 수 있으나 그건 영 모양 빠지지 않은가?
남미 여행 카페에서 여행 후기를 살펴보던 중 우연히 한 구인 글을 발견했다. 아르헨티나 칼라파테에 있는 후지 여관에서 일할 매니저를 찾는 글이었다. 글을 천천히 읽어보니 너무나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조건이었다. 냉큼 맨 아래 적혀있는 메일 주소로 지원 메일을 보냈다. 얼마 안 되어 사장님으로부터 답장이 왔고, 일하는 기간에 대한 조정이 있긴 했지만 여행 마지막 달인 8월 한 달을 후지 여관 매니저로 일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어쩌다 보니 브라질에서 시작하여 남미를 위로 크게 한 바퀴 돌아 아르헨티나로 가는 여행 루트가 완성되었다.
늦은 밤, 매트리스에 깊숙이 누웠다. 눈앞에 보이는 건 까만 천장뿐인데 그제야 내가 먼 곳에 와있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한다. 불안이 엄습하여 이불을 목까지 꼭 덮었다. 이제 정말로 혼자가 되어 이 여행을 시작하고 마무리지어야 한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럴만한 힘이 내게 있을까?' 두근거림이 진정 되질 않는다. 하지만 조금 설레는 것 같기도 하다. 쉽게 잠들기 어려운 밤이다.
서울은 적응이 되었나 싶다가도 낯설고, 이제 조금 알 것 같다가도 전혀 모르겠다. 갈 곳은 넘쳐나지만 머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공무원인지라 마음먹고 전보를 쓰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평생 살게 된다. 만약 서울을 떠나는 날이 온다면 무슨 일인지 몰라도 엄청난 결심을 한 거겠지. 서울에 큰 애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럴 일이 없길 바라는 아이러니한 마음.
나이가 들었는지 이제 편히 뿌리를 내리고 싶다가도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겨 마구 떠돌아다니고 싶기도 하다. 방황하는 걸 즐긴다기보다는 아직도 그럴 수 있는지 한번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건 상상만으론 알 수 없는 거니까. 머무는 쪽이든 떠나는 쪽이든 예상치 못한 인생의 새로운 국면에 다다를 순간이 오겠지. 그럴 땐 이 여행의 시작을 자연스레 떠올릴 것 같다.
떠밀린 줄 알았으나 바라던 대로 유유히 흘러갔던 그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