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쿠사”
물을 마시러 정수기 앞에 섰는데 갑자기 낯선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혼자 머리를 갸우뚱하다가 방에 있는 동생에게 물었다. “시라쿠사가 뭔지 알아?” “몰라? 처음 듣는데?” 동생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곱씹어도 어디서 들은 단어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혼자 생각해내려 애쓰다 어쩔 수 없이 문명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헤이 카카오, 시라쿠사가 뭐야” “시라쿠사. 시칠리아 섬의 동해안, 카타니아 남쪽 53km 지점에 있으며 고대 시칠리아의 중요한 그리스 도시였다. 1693년 도시가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지만 끊임없는 재건 노력으로 …” Ai가 ‘시칠리아’라고 말하자마자 “아, 분명 김영하 작가님 책에서 들은 단어구나”라고 확신했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김영하 작가님의 시칠리아 여행 에세이다. 이 책을 사서 읽은 지 꽤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최근 오디오 클립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직접 낭독해 주는 서비스를 구독하면서 다시 책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은 종료된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의 찐 팬으로서 이 오디오 클립은 선물과 같다. 낮은 중저음에 살짝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매력적이다. 난 청각에 정말 약한가 보다. 핸드폰으로 새로운 에피소드 알림을 확인하는게 나름 소소한 행복이 되었다.
길을 걸을 때도 출퇴근 지하철 속에서도 계속 반복해서 들었고, 특히 침대에 누워 들으면 어느새 스르르 깊은 잠에 들게 된다. 이 단어의 정체를 알자마자 푸하하- 웃음이 났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자신의 존재를 알아달라고 어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내 무의식 속에 얼마나 많은 단어가 숨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처럼 그 단어들이 입밖에 튀어나올 수 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범죄소설 오디오 클립을 듣지 않은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걸 보고 들을까. 그 수많은 정보들은 나를 통과해 어디론가 날아가거나 소멸되기도 하지만 개중에는 무의식 속에 살며시 스며들어온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왜 좋은 것만 보고 들으며 자라야 한다고 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시라쿠사'가 의식으로 튀어 올라온 것은 결코 가벼운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해프닝으로만 볼 수 없다.
지금은 입 밖으로 꺼내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언젠간 내 머릿속 가득 차지하고 두 발을 움직이게 될 거다.
나를 시칠리아로 데려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