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를 방황하는 젊은이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

by 독당근


크리스마스 아침 우디 앨런의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을 봤다. 오랜만에 양심의 가책 없이 침대에 누워 빈둥거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이다. 어떤 일이든 ‘크리스마스니까’라는 말로 충분한 하루. 뻔하게 <러브 액추얼리> 나 <로맨틱 홀리데이>를 보고 싶진 않았다. 넷플릭스를 휙휙 넘겨보다가 발견한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라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만드는 감독’의 영화라고 소개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우디 앨런은 도덕적으로 부도덕한 쪽에 가깝고 여러 스캔들을 달고 있어 사람 자체를 좋아하기는 아주 어렵다. 그런 걸 떠나서 그의 영화 자체는 늘 기발하고 재미있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그건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 <카페 소사이어티>, <로마 위드 러브>, <매직 인 더 문 라이트>, <블루 재스민> … 그의 영화는 깃털처럼 가볍게 볼 수 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 생각할 거리를 묵직하게 던져준다. 대체로 화려한 삶을 동경하다가 망하는 이야기, 사소한 선택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는 이야기, 운명처럼 급속도로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 보잘것없는 것임을 깨닫는 이야기로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이런 이야기들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면서도 그것을 경계해야 함을 엄중히 경고한다. 당황스럽고 난처한 상황에 빠지는 인물들에 나를 대입해 보면 냅다 도망치고 싶어 진다. 이 영화의 주인공 개츠비(티모시 살라메)는 뉴욕 상류층 출신 도련님이지만 그런 화려한 삶을 즐기지 않는다. 엄격한 어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며 벌써 대학을 몇 번 자퇴한 전적이 있다. 그는 재즈 피아노와 포커를 좋아하며(그리고 잘한다)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에서 대화는 잘 안 통하지만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 애슐리를 만났다. 학교 신문 기자인 애슐리는 유명한 영화감독을 인터뷰하기 위해 뉴욕에 갈 기회가 생겼다. 개츠비는 이 기회에 함께 뉴욕에 며칠간 머무르며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 이곳저곳을 그녀와 함께 다니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애슐리는 순간적인 선택으로 여러 상황에 휘말리게 되고, 개츠비는 그런 그녀와 어긋나면서 엉뚱한 곳에 가고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비 오는 뉴욕 거리를 처량하게 방황하는 개츠비는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와 닮아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보면 나도 어떤 거리를 정처 없이 방황하고 싶어 진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다만 이곳이 뉴욕이 아닐 뿐. 그리고 더 이상 10대나 20대의 젊은이가 아닐 뿐. 집 밖에 나가서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낯선 동네에 내리면 된다. 코로나를 핑계로, 해야 할 일들을 핑계로 미뤄왔는데 2022년의 버킷리스트에 꼭 넣어봐야겠다. 젊지 않다고 해서 나에게 할 질문이 또 내가 답해야 할 것이 없는 건 아니니까. 낯선 거리를 하염없이 걸어보자. 그러다 우연히 마음에 드는 작고 소박한 카페를 만나 자리를 잡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야지. 아, 그리고 앱으로 주변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며 살기 좋은 동네 인지도 확인해보아야겠다ㅎㅎ (이건 조금 멋없지만 중요하다!) 크리스마스 주간. 현실과 이상이 조화롭게 구현될 내년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