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이마
~넷째 날~
오늘은 정상에서 하루를 꼬박 보내는 일정이다. 5박 6일 일정 중 유일하게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하루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로라이마 정상 끝자락에 위치한 윈도우 포인트에 가보기로 했다. 트리플 포인트라고 해서 베네수엘라, 브라질, 가이아나 3국이 맞닿는 지점까지 가는 코스도 있었으나 가이드가 그곳은 특별히 볼 게 없어 굳이 안 가도 괜찮다고 했다. 게다가 왕복 8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더욱 갈 마음이 사라졌다.
윈도우 포인트는 바위 사이로 네모난 창문이 만들어진 포토 스폿이다. 큰 감흥을 일으키는 포인트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거대한 창문처럼 시원하게 뚫려있는 환상적인 절벽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발아래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을 보자니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로라이마가 스르르 이동할 것만 같다.
어느새 우리는 이곳의 엄청난 높이에 익숙해져 바위 끝에서 사진을 찍을 정도로 대범해졌다. 저 멀리에 서 있는 동료를 서로 찍어주기도 했다. 조나단은 크게 두 손을 흔들고 점프를 하는 과감함까지 보였다. 그는 이후에 페이스북으로 스카이 점프를 하는 영상도 보내주었는데 역시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포터들은 우리를 훨씬 뛰어넘었다. 어떻게 내려갔는지 저어기 아래 아슬아슬한 절벽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소화가 되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들에게 어떻게 내려갔는지 소리쳐 물으니 빙 돌아 내려가는 길을 알려줬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들이 있는 쪽으로 조심조심 내려가 보았다. 잠깐 있는데도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감이 들어 사진만 찍고 후다닥 올라와야 했다. 1분 이상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우리는 한참이나 윈도우 포인트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다시 캠핑장으로 걸어갔다. 인지하지 못한 사이 발가락에 잡힌 물집의 통증이 심해져 제대로 걷는 게 어려웠다. 물집이 건드려질 때마다 고통스러워 절뚝이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물집의 상태를 살펴보려고 잠깐 멈춰 쪼그려 앉았다. 알롱도 걱정되었는지 함께 쪼그려 앉아 기다려줬다. 그러다 그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었다.
"어쩌다 첫 여행을 남미로 오게 된 거야?"
발가락을 살피다 갑작스러운 그의 물음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남미는.. 여행을 많이 다닌 나에게도 오기 쉽지 않은 곳이란 말이지. 그런 곳을 어쩌다 첫 여행으로 오게 되었는지 궁금해."
글쎄 왜 난 그 많은 곳들 중에 남미여야 했을까. 어쩌면 남미가 아닌 다른 곳일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도 충분히 멋진 경험들을 할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내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때 유일하게 그 앞에 보였던 것이 남미였다. 그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남미로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난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룬 적이 없어. 그래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서 왔어."
이 말을 망설임 없이 내뱉어 버렸다. 게다가 전혀 떨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혼자 수없이 생각했을 때는 쉬이 내려지지 않던 답이 입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명확해졌다. 이런 물음에 담담하게 답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로라이마 정상에서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내가 동경하던 여느 책 속의 주인공처럼 나 역시 남미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만으로도 벅찬 마음이 들었다.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다섯째 날~
지난날들을 통틀어 가장 힘든 날이다. 근육통 때문에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다리가 후들후들 거린다. 다리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아 두 손으로 다리 하나를 옮기고 다시 남은 다리를 옮기면서 겨우 앞으로 나아갔다(조금 과장하자면 말이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내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가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연거푸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게다가 바닥이 상당히 미끄러워 자칫 고꾸라질 수도 있다. 다리가 계속 풀리려고 하여 주저앉지 않도록 오로지 정신력으로 온 몸을 지탱해야 했다. 근육은 도무지 아무 쓸모도 없었다. 너무나도 힘들고 지쳐만 간다. 전기장판을 틀어 따뜻하게 데워진 침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점점 정신이 흐려지고 두 눈이 감기려 했다. 정신을 놓다가 또 붙잡고를 반복하며 아래로 향했다.
드디어 내리막길이 끝나고 평지가 나타났다. 너무 안도한 나머지 평지에 발이 닿고 몇 걸음 못가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배낭이 무거웠던 터라 곧바로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다행히 반사적으로 손으로 땅을 짚어 얼굴을 들이박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다. 뒤이어 오는 사람과 마주치는 민망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영혼이 반쯤 나간 상태로 걸었다.
비가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려 이튿날 쉽게 건넜던 계곡 물이 엄청나게 불어있었다. 더 이상 사람이 건널 수 있는 깊이가 아니었다. 가이드는 카누에 멤버를 두 명씩 태운 뒤 거친 물길을 요리조리 피하며 노를 저어 차례로 강 건너편으로 옮겨주었다. 그는 우리 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 멤버도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리는 모두 존경 어린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후 모든 일정이 끝나고 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 때 우리는 몇 번이고 이때를 언급하며 박수를 쳤다.
다음 계곡은 그전보다 얕았지만 폭이 훨씬 넓었으며 물살이 상당히 세찼다. 반대편 육지까지 길게 연결된 줄에 의지하여 강을 건너야 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두 손으로 줄을 단단히 잡았다. 거센 저항을 이겨내며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건넜다. 살기 위해서 줄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강을 건너는 내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엄청난 물살이었다. 만약 그 줄을 놓쳤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다.
여러 고비를 넘어 간신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멤버들이 마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전우가 살아온 것처럼 나를 기쁘게 반겨주었다. 모두가 표정이 한결 부드럽고 온화하다. 한창 내려가는 도중에는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미간 사이 주름 하나씩 심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마 내 미간에는 두서 개 있었을 테지.
다리 전체를 감싸는 통증이 여전히 선명하다. 하지만 산속에서의 기억은 조각처럼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다. 어쩐지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내 두 발로 로라이마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만 순순히 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떠밀리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까지 내가 확인하려던 건 무엇이었을까? 로라이마의 신성한 기운이 나에게 손짓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운명과 같은 것이라는 무책임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정체가 무엇이든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으면서 걸어 들어갔다. 그 힘에 맞설 수 있는 나임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보니 로라이마는 첫날과 다름없이 고요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치열하게 산을 오르내리며 보낸 며칠간의 시간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때 내 표정이 어땠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