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이마
~셋째 날~
본격적으로 로라이마 산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듯했다. 울창한 숲은 그 거대한 크기만큼 습기를 가득 머금었다. 양 볼과 두 손 모두 기분 좋게 촉촉해져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고개를 드니 울창한 나무들이 어제 나를 괴롭히던 뜨거운 태양을 서늘할 정도로 가려주고 있었다. 숨 쉴 때마다 상쾌한 숲 내음이 들어가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와! 다람쥐 같아!"
가파른 산 길을 빠른 속도로 오르는 나를 보면서 알렉스가 말했다. 포터인 알렌도 잘 오른다며 칭찬해주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엄지를 척하고 올렸다. 그 열성적인 반응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힘을 주어 발돋움했다. 체력을 적절히 안배하지 않고서 초반부터 냅다 속력을 냈다. 드디어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는 설렘에 마음이 급해진 거다.
산길은 생각보다 더욱 험난했다. 상당히 비탈진 길이 곳곳에 나 있어 기어가다시피 해야 겨우 오를 수 있었다. 어제 캠프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손 내밀면 다다를 것 같은 꼭대기를 바라보며 자신감에 차 있었는데 이렇게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땀을 잔뜩 흘리고 나서야 크나큰 착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길이다.
산행 도중에야 캠프에서는 보이지 않던 다른 팀 멤버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며 고생한다는 것만으로도 동료애를 느꼈다. 그래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응원의 눈길을 강하게 내비쳤다(그들이 알아챘을지는 미지수지만). 내가 갈 길을 몰라 허둥대자 다른 팀 가이드가 어디선가 나타나 길을 알려줬다. 이상하게 그와는 템포가 맞아 함께 쉬어가는 타이밍에 그레놀라를 나눠먹으며 서로를 북돋아주었다. 물론 대화는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고초를 겪는 와중에도 산을 오르는 데 전혀 도움되지 않는 잡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점령한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한 질문을 또다시 떠올리고야 만 거다. 뒤이어 마음 한구석에서 '힘들어 죽겠는데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야?'라고 소리쳤지만, 어쩌면 이곳에 온 이유를 환기해야 그나마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는 고통을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떠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내 여행은 그 소임을 다했다고 느꼈다가도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한계'를 시험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건 비단 육체적인 한계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이유는 없는데 말이지.
나를 포함한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의문이 갑작스럽게 밀려들어왔지만 늘 그렇듯 썰물처럼 스르르 어디론가 들어가 버렸다. 새하얀 거품처럼 머리가 하얘졌다. 그러나 두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정상에 다다르자 길이 끊기면서 가려졌던 하늘이 완전히 드러났다. 지친 어깨를 토닥이듯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웅장하고도 아름다웠다. 가까이에서 만져지는 뭉그러진 구름 덩어리도, 발아래 피어오른 구름바다도 너무나도 신기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아찔한 높이에 소름이 오소소- 올랐다. 안전 가이드라인과 같은 게 전혀 없어 까딱 잘못하다간 추락하기 십상이었다.
사실 나의 취향은 로라이마의 전체적인 모습을 오롯이 담을 수 있는 산 아래 베이스캠프의 뷰이긴 했으나 상상만 하던 로라이마의 정상을 포기하지 않고 올라온 것에 더없이 기쁨이 느껴졌다. 미지의 땅을 발견한 모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멤버 중에 알롱이 가장 늦게 도착했다. 그는 카메라로 이것저것 찍으면 올라오느라 속도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에 그가 세계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프로라고 믿을 정도의 굉장한 실력이었다.
멤버들이 모두 정상에 도착한 걸 확인한 가이드가 함께 수쿠리 호텔로 이동하자고 했다. '이곳에 호텔이 지어졌다고?' 하며 기대 반 의심반으로 따라갔다. 조금 더 걷자 바위로 된 지형이 끝나고 흙으로 된 길이 나왔다. 누군가 눈을 가리고 헬기에 태운 뒤 뚝 떨어뜨려 놓는다면, 이곳이 산 꼭대기라는 것을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넓은 평지이다. 도중에 자쿠지라고 수영을 할 수 있는 깨끗한 자연 풀장이 있었는데 몇 명은 들어가서 수영을 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가이드의 발길이 멈춰 선 곳은 오목하게 들어간 커다란 바위 형지. 바위가 든든한 지붕과 평평한 야영지가 되어 텐트를 치기 안성맞춤이었다. 아, 이곳이 호텔이군. 조금 허무해진 순간이다. 하긴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로라이마 꼭대기에 호텔이 지어진다면 마진이 별로 남지 않을 거다. 게다가 가족, 친구들과 생이별해야 하는 호텔 직원들은 무슨 고생인가.
수쿠리 호텔 주변 경관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특히나 바로 앞에 비가 고여서 만들어진 호수가 환상적이었다. 그 고요하고 푸른 물은 요동도 없이 거울처럼 하늘을 그대로 비추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모네의 그림 같기도 하다. 평온한 호수에 괜스레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져 본다. 잔잔한 파동이 아름답게 퍼져나간다.
밤이 되자 우리는 한층 더 가까워진 별 무더기 아래 모였다. 불을 피운 주변에서 빙 둘러앉아 오늘의 무용담을 나누며 큰 소리로 웃었다. 어색하기만 했던 우리는 어느새 눈을 마주치며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였다. 밤공기는 차가웠으나 서로를 향한 눈길은 너무나 따스했다.
오늘 밤부터는 혼자 텐트를 쓰지 않는다. 지난 이틀 밤 동안 알렉스가 코를 심하게 고는 탓에 조나단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나에게 함께 텐트를 쓸 수 있는지 제안한 것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부탁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잠을 편히 못 자는 건 상당히 고통스러운 거니까. 게다가 오늘은 정말 피곤한 날이지 않은가. 좁은 공간에 둘이 있는 게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금세 기우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수학여행에 온 것처럼 조나단과 밤늦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에게 스페인어를 배우기도 했는데 내 형편없는 스페인어 실력 때문에 둘 다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러다 결국 옆 텐트에 있는 동료로부터 한 소리를 들었다.
"미안한데 작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