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이마
~둘째 날~
차갑고 습한 아침 공기로 가득한 텐트에서 눈을 떴다. 여름이라 못 견딜 만한 정도의 추위는 아니었지만, 선뜻 몸을 일으키기는 힘들다. 어제의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았나 보다. 오래된 침낭에다 기능을 제대로 하지는 못하는 얇은 매트를 깔고 잤으니 그럴 만도 하다.
포터가 마련해준 작은 텐트에는 남자 둘, 여자 둘씩 짝을 맞춰 들어갔다. 9명이라 짝이 맞지 않은 나는 혼자 텐트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밤 사이 산짐승이 내려온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금 무서웠지만, 텐트 안에 들어가 보니 1인용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작은 크기임을 확인하고는 혼자 쓰는 게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텐트 너머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보니 늦게 일어난 건 아닌가 보다. 조금만 더 자면 피로가 풀릴 것 같아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결국 빈 허공을 보며 눈만 깜빡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별 생각이 없다가도 문득 이곳이 남미라는 낯선 곳이라는 걸 자각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럴 때면 쉬이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텐트에서 나온 나는 눈앞의 광경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마리의 개미들이 커다란 마당을 모두 점령하고 내 텐트로 진격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얼른 신발을 챙겨 신고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탁자로 내달려 갔다. 일찍이 일어난 부지런한 친구들이 태연하게 웃으며 “Good moring.”, “Buenos dias.”하고 반갑게 맞이해줬다. 알고 보니 이들도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뒤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움직이는 생물체는 찾아볼 수 없는 허허벌판이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새까만 개미떼가 같은 방향으로 기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기이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어느새 개미떼들이 곤히 잠들어 있는 다른 동료들의 텐트를 습격하려 하자 나는 원숭이처럼 다시 마당 안으로 폴짝폴짝 뛰어 들어가 텐트를 흔들며 호들갑스럽게 잠을 깨웠다. 그 모습이 꽤 재미있었는지 등 뒤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여유를 되찾고서야 로라이마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아침의 로라이마는 여전히 근사했다. 낮과 밤 그리고 아침에 보는 로라이마는 모두 다른 모습으로 매력적이다. 낮에는 활기찬 에너지가 샘솟아 나오고, 밤에는 별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그리고 아침은 고요한 적막 속에서 더없이 신비롭고 고고해 보였다. 따뜻한 커피 한잔이 있었다면 더욱 완벽했을 거다.
이런 순간이 소중한 걸 모두가 잘 알고 있다는 듯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이따금 고개를 돌려 로라이마를 가만히 응시했다. 눈부신 아침햇살이 우리를 따사롭게 비춘다.
우리는 요리사(겸 포터)가 준비한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겼다. 떠나기 전에 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제안에 모두 흔쾌히 좋다고 답했다. 로라이마를 배경으로 멋지게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하필 역광이라 모두 얼굴에 어둡게 그늘이 져 버렸다. 마치 위험한 전장에 가는 전사들처럼 나왔다. 차선책으로 로라이마의 바로 옆에 있는 쌍둥이산 쿠케난을 배경으로 다시 사진을 찍었다.
쿠케난 역시 테푸이라서 누군가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며 로라이마에 등반했다고 말해도 아무도 못 알아챌 거다. 누군가에게 사진을 보여줄 때마다 역광이라 로라이마를 배경으로 못 찍고 어쩔 수 없이 바로 옆에 있는 테푸이를 배경으로 찍었다고 구구절절 설명하긴 피곤하니까.
쌍둥이 산이라고는 하지만 둘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로라이마가 평평하고 부드러운 인상이라면 쿠케난은 좀 더 각이 지고 강한 인상이다. 모범생 형과 날라리 동생이랄까? 쿠케난은 로라이마보다 낮지만 절벽이 심하게 나 있어 걸어서 등반할 수 없다고 한다. 암벽을 타던가 헬기로 정상에 오르는 수밖에 없다. 구름이 휘감은 와일드한 쿠케난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 우리는 여느 책 속에 나올법한 모험가처럼 멋졌다.
로라이마가 테푸이 중 그나마 걸어서 등반이 가능한 산이라 하더라도 가이드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선 표지판이 불친절하게 듬성듬성 자리 잡기도 하고(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길이 어디로 나아 있는지 일반 사람들의 육안으로는 알아보기 힘들기에 자칫 길을 잃기 쉽다. 그리고 희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심하여 발을 잘못 헛디딜 수 있으니 혼자 등반을 시도하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 타지에서는 도심에서 길을 잃어도 잔뜩 긴장되고 불안해지는데 이런 오지에서는 더욱 패닉 상태가 될 거다. 이곳의 특성상 비가 갑자기 내려 계곡물이 불어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고립되기 십상이다.
선두에 선 리더를 따라 우리는 차례로 길을 나섰다. 오늘은 로라이마 바로 아래 도입부 까지 가는 일정이다. 산 정상까지 오를 줄 알았던 나는 내심 아쉬웠다. 베이스캠프에서 로라이마를 바라봤을 때 바로 밑까지는 너무 쉽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른 정상을 올라가는 기쁨을 맛보고 싶기도 했다,
나의 거만함을 비웃듯이 로라이마를 향하는 길은 쉽지 않았다. 계곡을 두 개나 건너야 했고 평평할 줄만 알았던 길은 오르락내리락 여러 언덕을 넘어야 했다. 머리 위로는 강한 햇빛이 내리꽂았고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배낭의 무게 기진맥진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트레킹에 부적합한 나이키 러닝화로 인해 발아래 돌멩이의 각진 부분을 생생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머리 위와 발아래 모두 고통스러웠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선두에 서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쉬엄쉬엄 쉽게 이곳을 완등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쓰고 나니 어째 쓸데없는 고집 같기도 하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앞서가던 조나단이 걸음을 멈춰서 자신의 짐이 가볍다며 바꿔 드는 게 어떻겠냐며 물어봐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의 짐은 아주 단출했다. 얇은 비닐 가방에다 부피가 굉장히 작아 보였다. 그의 가방을 살짝 들어보며 아주 잠깐 흔들렸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난 괜찮아. 고마워”
그는 씨익 웃고는 다시 돌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 역시 곧바로 뒤따라 걸었다.
그 찰나의 마음을 되돌아보면 그저 나의 짐은 내가 짊어지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속 편히 내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홀가분하게 만들지 몰라도 결국 떳떳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건 나를 더욱 괴롭게 할 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무력감'과 비슷한 종류의 감정만 느껴져도 극도로 흔들렸다. 그래서 이곳에서 만큼은 더욱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이 짐을 지고 끝까지 완등 하고 싶었다. 이 역시 괜한 고집 같기도 하다.
여유로운 어느 날 시우닷 볼리바르의 한 숙소에서 조나단은 그런 나의 태도가 좋아 보였다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해주었다.
3시간 반 만에 산 아래 뷰포인트에 도착했다. 어제보다 한 시간 덜 걸렸으나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그에는 뜨거운 햇빛이 크게 한 몫했다. 그래도 멤버 중 세 번째로 도착하여 무척 기뻤다. 알롱과 사쿠가 나에게 트레킹을 잘한다며 칭찬해주어 더욱 으쓱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광활한 테푸이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아주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를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 주는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곳곳에 안개가 무겁고 짙게 깔려있었다. 그 덩어리가 꽤 커서 구름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구름과 섞여 있는지도 모른다. 저 너머에는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고, 절벽 한쪽에는 아주 기다랗게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대자연 속의 로라이마는 더욱 장엄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몸을 한 바퀴 빙 돌려가며 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곳을 두 눈에 담고자 했다.
출발하기 직전 정상까지 빨리 오르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했던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그저 산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허무한 트레킹을 했더라면 이 멋진 곳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을 거다. 그랬다면 두고두고 아쉬움 남았겠지.
석양이 천천히 저물고 있다. 저 멀리서 거대한 테푸이를 집어삼키는 어둠이 서서히 다가온다. 다채로운 주홍빛 석양을 천천히 삼키는 어스름에 왈칵하고 벅찬 감정을 느낀다. 겨우 하루가 끝날뿐인데.
이번엔 맥주가 있었다면 좋았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