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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통해 얻게 되는 것(2)

로라이마

by 독당근



무성한 수풀 사이 황량해 보이는 기다란 길 하나. 그 끝에는 내가 꿈꾸던 그곳, 로라이마가 기다리고 있다. 하늘이 구름으로 가득 차 햇빛이 강하지 않아 다행이다. 언제부턴가 자외선에 굉장히 약해져 강한 햇빛에 조금만 노출되어도 기운을 몽땅 빼앗겨버린다.


우리는 따로 또 같이 길을 걸었다. 나는 일본인 사쿠와 함께 걷다가 혼자 걸었다. 그러다 미국에서 온 민과 알리와 함께 걷다가 또다시 혼자 나아갔다. 스페인어를 거의 못하는 나는 포터와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가끔 엄지를 척 올리며 서로 응원하기도 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사쿠는 내가 사는 고향의 조선소에 업무차 세 번 정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철강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지금은 그만두고 세계여행 중이다. 세 번씩이나 내 고향에 방문한 일본인을 로라이마 트레킹 멤버로 만나게 될 줄이야. 엄청난 인연이구나! 그는 다부진 몸에 턱수염을 살짝 길렀고 눈빛이 또렷하여 한눈에 강인하고 건강한 사람이라 느꼈다. 일본인은 영어 발음이 안 좋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깜짝 놀랐다. 그는 한국인과 생김새가 비슷하여 차에 타기 전 그를 처음 봤을 때 ‘한국말로 인사를 해야 하나?’하고 긴가 민가 했었다. 반대로 그는 나를 보며 ‘일본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여 조금 우스웠다.


종종 리더가 나에게 다가와 컨디션이 괜찮은지 살펴봐주었다. 그는 키는 작지만 단단한 몸에 우직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언제나 친근하게 멤버들에게 다가왔고 쾌활하게 에너지를 북돋아주며 그룹을 이끌었다.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이 길은 평지라 걷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돌덩이가 하나씩 추가되는 것처럼 배낭이 점점 무겁게 느껴지는 데 있었다. 내다 버릴 수도 없으니 이를 악 물고 버티는 수밖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기까지 총 네 시간 반이 걸렸다.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가장 늦게 도착하지 않은걸 확인하고는 크게 안심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이 그룹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하는 멤버(혹은 짐)가 되는 건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다.


베이스캠프에는 풀 한 포기 없는 휑한 공터에 다 쓰러질 것 같은 나무로 만든 집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이 한 두 평 남짓한 집 안에서 다 같이 잘 수 있을까?’라고 걱정하던 차에 포터들이 아주 능숙하게 텐트 여러 개를 착착 세워 올렸다. 텐트는 성인 두 명이 딱 붙어 잘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오두막집 바로 옆에는 기다란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다들 지쳐서 주변에 짐을 대충 풀어놓고 옷가지와 배낭은 지붕 아래에 대롱대롱 걸어 놓았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시원한 물을 마시며 크게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나는 바리바리 싸온 그레놀라 하나를 단숨에 먹어치웠다. 포터는 어느새 요리사로 탈바꿈하여 우리를 위한 저녁식사를 준비해주었다. 비록 핫케이크와 초코맛이 거의 안나는 밍밍한 코코아였지만 지치고 피로한 우리에게는 고급 요리를 먹는 기쁨과 다를 바 없었다.


어느새 베이스캠프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우리는 랜턴을 켜고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서로 사는 곳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이런 멋진 곳에 함께 한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스쳐가는 인연이 될지 오래 함께하는 인연이 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5박 6일간 동거 동락하며 소중한 순간을 함께 나눈 다는 것이다.


오래 앉아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하여 주변을 휘적휘적 걷는데 사쿠의 손가락 끝이 하늘을 가리켰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따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밤하늘이 보석같이 반짝이는 별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수많은 별들이 가득했다.


마치 우주에 있는 듯한 환상적인 기분이 들다가도 내게로 별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사쿠가 다가와 ‘우유니 사막에서도 이런 멋진 밤하늘을 볼 수 있을 거야’라고 귀띔해 주었다. 다시 한번 멋진 밤하늘을 볼 수 있다니! 너무나도 기뻤다. 이 황홀경은 이 근방에 사는 누군가에게는 흔한 밤하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먼 곳에서 날아와 또다시 먼 길을 걸어온 내가 보는 하늘은 그들이 보는 것과는 분명 다르겠지. 눈부신 별빛을 두 눈 가득 담으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남미에서의 하루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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