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이마 트래킹은 여행자 한 팀이 모이면 가이드 한 명, 짐을 옮기는 포터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인다. 팀에 있는 사람 수만큼 비용을 나누게 되니 가능한 사람들을 많이 모아야 한다. 포사다 미쉘에 막 도착했을 때 함께 트레킹을 할 동료들이 손을 흔들며 밝게 맞이 해주는 그림을 상상했다. 하지만 숙소는 오랫동안 불을 킨 적이 없는 곳처럼 어두컴컴하고 조용했다.
이대로 며칠 동안 발이 묶여 다른 여행자들을 기다리기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됐다. 환전을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도 희망을 놓지 않으며 그 사이에 여행자가 단 한 명이라도 와있길 기대했으나 여전히 숙소는 고요했다. 오히려 한층 더 어두워진 느낌이다. 그때 포사다 미쉘의 주인장이 나에게 다가왔다.
“알아보니 백패커스에 사람이 두 명 있다고 하네요. 거기로 가보는 건 어때요?”
그의 말은 나에게 한 줄기 빛처럼 두 눈이 번쩍 뜨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보통은 손님을 붙잡아 두기 위해 이런 정보를 알려주지 않나?’하는 생각에 의아했다. 이렇게 순순히 나를 보내주는 건 내가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로라이마 트레킹을 신청한 사람이 몇 명인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물어보았던 것이 주인장의 눈에 아주 간절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말에 눈에 띄게 풀이 죽은 내 모습이 안타까우셨는지도 모른다.
아직 완전히 짐을 푼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떠나도 되는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내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의 목적은 로라이마에 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로비에 있는 가방을 냉큼 들쳐 맸다. 고개를 연신 숙이며 “Gracias!”라고 말하며 백패커스로 향했다.
백패커스는 포사다 미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금방 도착했다. 드디어 방에 짐을 풀고 한 숨 돌렸다. 이곳도 포사다 미쉘과 같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사람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잠깐 외출을 했을 거라 생각하며 백패커스에 딸려있는 레스토랑에 내려와 샌드위치와 주스를 주문했다. 확실히 브라질보다는 물가가 쌌다.
음식을 거의 다 먹고 수첩에 방금 먹은 음식 값을 적고 있는데(여행 초기에는 꼼꼼하게 가계부를 작성했다) 누군가가 내 앞에 앉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한 남자가 제 자리인 듯 아주 자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의 테이블에 앉는 경우가 없으니(그것도 어떤 허락을 구하지 않고) 아주 당황스러웠다. 이때만 해도 여행 초기라 나는 낯선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여행에서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속도는 일상과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갑작스럽다.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두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작 당사자는 고개를 돌려 여유롭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짙은 갈색 단발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잘생긴 남자였다. 묘하게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아라곤을 연상시켰다.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할 말을 생각하는데 그가 갑자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서 인사를 했다.
“안녕? 넌 어디서 왔니?”
“안녕..? 난 한국에서 왔어.”
“난 영국에서 왔어. 알레한드로 야.”
“난 지현.”
그는 거침없이 불쑥 다가오는 적극적인 면모에 비해 무표정에 차가운 인상이었다. 그다지 외향적이거나 활달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서로 간단한 소개를 마치자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뒤쪽에서 갑자기 어떤 남자의 밝은 목소리가 들렀다.
“안녕! 난 클라우디오 야. 여기서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너밖에 못 봤어!”
그 역시 옆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안녕 난 지현. 반가워. ”
“얼마나 여행을 하는 거야?”
“난 4개월 정도 남미를 여행할 생각이야.”
“정말 용감하네!”
클라우디오는 쾌활한 표정으로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남미 사람들은 엄지를 올리는 제스처를 많이 사용한다. 알고 보니 클라우디오는 베네수엘라 사람이고 알레한드로는 칠레 사람이었다. 이들은 런던에 살고 있는데 여행 차 남미를 잠깐 들렀다고 했다. 붙임성 좋고 친절한 두 사람과 5박 6일의 여정을 함께 하게 꽤 즐거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 내일 간단한 투어만하고 이곳을 떠난다고 했다. ‘여기까지 와서 로라이마를 건너뛰다니!’라는 생각에 놀랐지만 이들은 큰 결심을 하고 남미에 와야 하는 나와 입장이 다르다.
다음날 아침 포사다 미쉘 옆에 붙어있는 작은 가게에서 아침식사 대용으로 요거트를 사는데 또 어디선가 알레한드로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나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는 오늘 투어를 할 건데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합류하겠다고 했다. 여전히 로라이마 트레킹 멤버가 한 명도 오지 않은 상황에서 숙소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낼 바에는 뭐라도 하는 게 낫다.
알레한드로가 알려준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가니 40대 중반 정도의 여자 투어가이드와 새로운 여행자 한 명이 보였다. 그는 자신을 Alone이라는 닉네임으로 소개했다. 그는 작은 체구에 비해 큰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닉네임처럼 홀연히 사라져서 내가 찍은 사진의 10배는 멋진 사진을 찍어 돌아온다. 알롱은 말레이시아인이지만 싱가포르에 살고 있다. 남미에 있으니 외적으로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아시아인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 역시 나처럼 로라이마 트레킹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던 중이었다고 하자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투어는 간단했다. 차를 타고 브라질로 넘어가 테푸이를 멀리서 쭉 둘러보는 거다. 물론 중간에 계곡이나 폭포를 구경하기도 했지만 메인은 역시 테푸이다. 국경을 넘기 때문에 여권 확인과 간단한 짐 검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검문을 한다고 하니 괜히 긴장되어 의심을 살 물건은 없는지 가방 속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예상대로 국경 경찰이 차를 세웠으나 다행히 여권이나 짐을 검사하는 절차 없이 가이드가 제시한 신분증만 확인하고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
도로는 다른 차들이 없어 앞이 뻥 뚫려있다.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를 매끄럽게 내달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가득 차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이미 먼 길을 떠나왔는데 더욱 먼길을 떠나는 기분이다. 한창 달리는 도중 주위가 조금 어두워졌다 싶어 바깥을 내다보니 새파랗던 하늘은 온대 간데없고 우중충한 어두운 구름이 우리 머리 위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란 사바나 지역은 열대우림 기후라 날씨가 변덕스럽고 비가 자주 내린다.
쌩쌩 잘 달리던 차가 갑자기 도로 중간에서 멈춰 섰다.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어리둥절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내리길래 나도 따라 내렸다. 주변에는 서부영화에서 본 듯한 황량한 대지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향해 가리키며 “저기 좀 봐!”라고 소리쳤다. 커다란 구름이 걷히면서 서서히 테푸이가 그 존재를 드러냈다.
테푸이를 실제로 보면 크게 감탄할 거라 상상했는데 막상 마주 하니 ‘낯설다’는 느낌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왔다. 구름이 더 걷어지자 하나둘 씩 나타나는 테푸이들은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마치 낯선 존재가 네모 반듯한 돌덩이를 툭, 툭 놓고 간 것처럼 이 세상과는 이질적이었다. 문득 ‘이런 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 광경은 신비로우면서도 이상하게 두려움을 일으켰다. 외계인을 보게 된다면 지금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될 거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테푸이를 바라보았다.
투어가 모두 마치고 클라우디오와 알레한드로는 8시 버스로 앙헬 폭포가 있는 시우닷 볼리바르로 넘어간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짐을 챙기고 나와 알롱은 6시에 약속을 잡아둔 포사다 미쉘과 연계된 투어사의 프란시스코 씨를 만난 뒤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와 알롱은 포사다 미쉘 앞에서 프란시스코 씨를 기다리는데 어느새 칠레에서 온 조나단도 우리와 함께 그를 기다렸다. 순식간에 트레킹 멤버가 세 명이 되었다.
프란시스코 씨는 어제 나와의 약속을 어겨 만나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때마침 백패커스 투어 관계자인 에릭이 와서 우리에게 이리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 보니 여자 두 명이 더 있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온 민과 홀리이다.
에릭은 로라이마 트레킹에 대해서 그림까지 그리며 꼼꼼히 설명을 해주었다. 알롱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독일인이라 신뢰가 가.”라고 속삭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채식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거다. 남미는 여러 국적의 다양한 사람이 방문하는 여행지인 만큼 어디에서나 채식인을 위한 식단이 있어 큰 불편함을 없이 여행할 수 있다. 우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에릭과 악수를 하며 내일 아침 10시에 계약을 마무리하고 바로 트레킹을 떠나기로 했다.
다시 만난 알레한드로는 자신은 베네수엘라에 좀 더 머물다 가니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라며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를 살짝 안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무뚝뚝한 클라우디오 역시 내 앞에 스윽 다가오더니 조심히 여행을 잘하라고 말해주며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서로의 여행에 행운을 빌어주었다. 여행에서는 만남도 헤어짐도 너무나도 빠르다.
다음날 아침 계약을 하러 갔을 때 사무실 주변이 북적였다.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보여 깜짝 놀랐다. 기존 멤버에다가 밴쿠버에서 온 앤드류, 일본에서 온 사쿠, 기아나 프란스에서 온 스테파니와 그녀의 친구(이야기를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까지 총 9명의 멤버가 모였다. 다들 어디에 있다가 당일에서야 이렇게 한꺼번에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숨겨져 있던 테푸이가 구름이 걷혀 모습을 드러내듯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우리는 한 팀이 되어 5박 6일의 대장정을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