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폭동의 첫 시작점인 2013년 5월 나는 베네수엘라에 도착했다.
먼저 브라질 상루이스에서 비행기로 출발하여 아마존이 있는 마나우스를 거쳐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보아비스타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뜬눈으로 날을 새고 아침 일찍 버스로 국경 마을 파카라이마로 향했다. 그곳에서 베네수엘라로 넘어가는 건 오로지 택시만 가능하다고 하여 작은 택시를 잡아 베네수엘라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도착했다.
상루이스를 출발할 때부터 비가 쏟아졌다가 그치기를 반복하여 하늘은 우중충했다. 좁은 도로를 열심히 달리던 택시가 멈춰 섰을 때 본 출입국 관리사무소는 ‘설마 저곳은 아니겠지?’라고 생각될 정도로 아주 아담하고 허술해 보였다. 긴 창을 든 문지기들이 철벽 방어를 하는 모습을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자신의 영토에 넘어 올 낯선이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있을 거라 예상했던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직원 한 사람이 책상 하나를 두고 앉아 있었다(딱 그 정도의 크기이다). 이런 분위기인 터라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 좋았지만 기사님의 실수로 잘못 온 게 아닐까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어 살짝 불안해졌다.
직원은 어떠한 경계심도 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렇다고 딱히 환영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녀는 나에게 “직업이 뭔가요?”, “여기는 왜 왔나요?”라고 딱 두 가지 질문만 했다. 나 역시 간단하게 “학생입니다”, “배낭여행하러 왔어요.”라고 답했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입국 도장을 쾅하고 찍어주었다. 난생처음 육로로 국경을 넘는 터라 잔뜩 긴장했던 게 무색할 만큼 허무했다.
택시는 로라이마 트레킹의 출발지인 산타엘레나에서 멈춰 섰다. 카페에서 찾아본 정보로는 포사다 미쉘과 백패커스라는 두 호스텔에서 로라이마 투어를 신청할 수 있다고 했다. 두 호스텔의 싱글룸 가격은 같은데 투어비는 백패커스가 조금 더 비쌌다. 그래서 나는 기사님께 포사다 미쉘로 가달라고 말씀드렸다.
기사님은 그곳을 잘 모르셨는지 길을 가던 사람을 급히 불러 세워 물어봐주셨다. 큰 무리 없이 쉽게 베네수엘라로 들어와서 숙소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택시를 탈 때는 '혹시 나쁜 사람이면 어쩌지?'라는 걱정에 좌불안석으로 있었으나 이렇게 안전히 목적지까지 내려준 기사님이 웃으며 인사해주시자 좀전 까지 의심한게 죄송했다. 나도 "감사합니다! (Gracias)"하고 밝게 인사했다.
포사다 미쉘에 잠깐 짐을 내려놓고 환전을 하기 위해 호스텔 직원이 알려준 거래 장소로 향했다. 베네수엘라는 반드시 암거래로 환전을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공식 환전소를 이용하면 10배 가까이 환율이 차이가 나 엄청난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암환전상과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게 영 찜찜했다. 내 상상 속 암환전상은 아주 음침한 표정에 어두운 뒷 세계의 큰 세력과 결탁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예상은 빗나갔다.
호스텔 직원이 알려준 거리로 들어서자 누가 봐도 여행자인 나에게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비스 마인드를 장착하고 활짝 웃으며 “아리가또~깜비오(cambio, 환전)?”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남미에서는 동양인만 보면 일본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거리에는 암환전상이 쫙 깔려 있어 경쟁률이 매우 치열했다. 무작정 자신을 따라오라 손짓하는 무례한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깐깐한 표정을 지으며 무시하고 더 안쪽으로 당당하게 파고들어갔다.
처음에 거래를 시도했던 환전상이 1달러에 20볼리비아르를 불러 그걸 기준으로 여러 환전상을 거치며 네고한 덕에 최종적으로 23.5 볼리비아르로 환전을 하게 되었다. 내가 거래를 한 환전상은 나이가 40-50대로 보이며 진중한 인상에 짙은 콧수염을 가졌다. 그는 방금까지 지나쳤던 다른 환전상들처럼 가벼워 보이지 않아 신뢰가 갔다. 그리고 수습생으로 보이는 내 또래의 남자가 그의 옆에 찰싹 붙어있어 신뢰도가 더 상승했다. 견습생이 있을 정도라면 프로라는 의미이니까. 물론 나쁜 쪽으로 프로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깜깜한 가게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거래했다. 항상 대충대충 하는 나이지만 돈을 셀 때 만큼은 아주 꼼꼼했다. 왠지 영화 속 한 장면에 있는 것처럼 스릴 넘쳤다. 지폐가 엄청나게 두꺼워져 큰돈이 수중에 있다는 걸 자각하면서 살짝 긴장이 되었다. 환전상이 안전하게 돈을 분산해서 몸에 넣어라고 해서 돈을 이곳저곳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나는 황급히 빠른 발걸음으로 숙소를 향했다. 여전히 환전상들이 웃는 얼굴로 '아리가또'라며 다가오는 걸 뿌리 치면서 걷고 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