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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현실로 되는 순간(2)

by 독당근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두워지기 전에 동네를 둘러보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이곳까지 와서 이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낼 순 없다. 그건 언제나 또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거니까. 먼 곳까지 온 만큼 새로운 상황에 내던져지고 싶었다. 안전한 숙소에서 웅크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호스텔 문을 나섰다. 떨리는 내 속을 알 리 없는 스태프는 미소를 지으며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선 스태프가 절대 가지 말라고 경고했던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일요일이라 사람이 없어 거리가 한산했다. 낯선 여행자의 등장에 사람들은 경계하듯 힐끔힐끔 곁눈질로 바라본다. 조금 무서웠지만 그럴수록 어깨를 활짝 펴고 큰 보폭으로 걸었다. 이렇게 하면 누구도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 같다. 이때의 습관이 남아있는지 자신감을 충전하고 싶을 때 의식적으로 어깨를 열어젖히며 당당하게 걷는다. 언제나 통하는 방법이다.


상루이스는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 역사적인 도시이다. 이 도시는 17세기 최초의 도시계획인 직교형 거리 배치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길이 구불구불하지 않고 깔끔한 직선이라 길을 잃어도 왔던 길로 쭉 돌아가면 된다. 나처럼 직감대로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인 도시이다. 건물 대부분이 포르투갈 식민도시의 전형적인 양식인 유리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잘 빚은 도자기처럼 윤이나는 건물들은 우중충한 날씨임에도 그 존재감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거리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영화에서만 보던 이국적인 거리와 건물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이런 곳에 ‘혼자’ 와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여기가 지구 반대편이라는 사실을 의식할 때마다 매번 놀라움의 연속이다. 이탈리아 단기여행도 겁이 나서 취소해버렸던 내가 남미까지 오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운명’이라는 단어는 무척 진부하지만 다른 어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어느새 교회와 법원, 은행과 같은 큰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시내까지 왔다. 여기까지만 둘러보고 돌아갈까 하다가 욕심이 생겨 더 걸어가 보기로 했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길이 끝나고 바다가 보이는 지점까지 와버렸다. 늘 시작하는 게 어렵지 막상 하고 보면 뭐든 씩씩하게 해낸다. 이 여행도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잘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거라도 없었다면 여전히 한국에 있었겠지.


바다까지 보고 나니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숙소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왔던 길을 따라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진한 먹구름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더니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큰 일이다!’ 보폭을 더 크게 하여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다행히 호스텔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우수수- 쏟아 내렸다. 휴, 운이 좋았다.


빗물을 털어내며 도미토리 문을 열자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가 바닥에 앉아 있었다. 단번에 그녀가 스태프가 말했던 룸메이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숙소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막 배낭을 풀고 정리 중이었다. 탄탄한 근육질의 늘씬한 몸이 눈에 띄는 그녀는 무표정에 강해 보이는 턱과 눈빛으로 인해 한 방에 있지 않았더라면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을 엄청난 포스를 가졌다. 내가 생각한 전형적인 배낭여행자의 모습이다.


그녀의 기에 살짝 눌렸지만 눈이 마주치고는 반사적으로 먼저 ‘Hi’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녀 역시 손을 살짝 들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씨씨. 알고 보니 프랑스가 아니라 기아나에서 왔다. 이곳은 베네수엘라 옆에 있는 나라인데 스태프가 가이나 프란시스(Guyane française)라고 말한걸 잘못 알아들었던 거다. 특이하게도 이 나라는 과거 식민지에 따라 가이아나(영국령), 수리남(네덜란드령), 프랑스령 기아나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씨씨가 어제 바헤이리냐스에 갔다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놀란 곧바로 렌소이스 마라넨지스 국립공원에 간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실제로 어땠는지, 정말 사진처럼 멋진지, 사막에 물이 많이 고여있는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궁금증을 다다다 쏟아냈다. 그녀는 사막에 물이 많이 고여있고 아주 멋졌다고 말하며 그곳을 회상하는 듯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긍정적인 대답에 기대감이 샘솟았다. 씨씨는 가방을 뒤지더니 렌소이스 마라넨지스 국립공원 팸플릿을 꺼내 나에게 주며 가져도 된다고 했다. 갑작스럽지만 여행자와의 첫 정보 교류가 성사되었다(물론 받기만 했지만). 진짜 배낭여행자가 된 듯한 설레는 기분이다.


씨씨의 나라에서는 프랑스어를 쓰기 때문에 스페인어는 계속 공부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앞으로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등을 여행하면서 스페인어를 배울 계획이다. 내가 앞으로 여행할 루트와 비슷해서 왠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 역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중이라고 당당히 말하자 그녀는 반가워하면서 갑자기 스페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머지 손사래 치며 ‘비기닝! 비기닝!’이라고 말하자 씨씨는 아주 큰소리로 웃었다.


늦은 밤 우리는 각자 침대에서 내일을 위해 재정비를 했다. 호스텔에서 예약해준 LockBem이라는 버스가 내일 아침 7시에 나를 픽업하여 바헤이리냐스 까지 데려다준다. 하루나 이틀 정도 묵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게 될 테니 여기에 두고 갈 물건과 가져갈 물건을 신중히 구분했다. 씨씨는 내일 이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일찍 일어나야 하니 정리를 끝내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잠자리에 들었어도 내일 비가 오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바람에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손꼽아 기다려온 사막을 추적추적 비를 배경으로 맞이하고 싶지 않다. 만약 비가 온다면 날이 맑을 때까지 버틸 심산이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오늘 비가 많이 왔기에 내일은 빗물이 많이 고여 환상적인 호수를 원 없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떤 하늘이 나를 반길지 모르겠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마음을 가다듬고 나니 무사히 하루가 지나간 것에 긴장이 풀리면서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이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창 밖을 내다보았다. 지난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빗물에 씻긴 푸르른 하늘이 개운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파란 하늘과 타일이 잘 어울린다.
직선으로 길게 뻗은 거리
내일 가게 될 렌소이스 마라넨시스 사막이 그려져 있다.
어디서나 타일로 된 건물을 만날 수 있다.
건물뿐 아니라 표지판까지도 타일로 만들어졌다.
남미에서도 길냥이는 귀엽다. 단잠을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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