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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그들이 나 만할 때는 말이야

짚어보는 개인의 역사

by 투명물고기

"내가 너 만할 때는 말이야.." 이 말을 달갑게 듣는 젊은이는 모르긴 몰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뒤의 내용이 얼마나 좋건 나쁘건 들어보기도 전에 "꼰대" 낙인을 꽝 찍고 그 뒤의 말은 이미 시큰둥하게 건성으로 듣고 넘어가기 모드가 대부분일 것이다. 결코 검증될 수 없을, 상당히 미화되었을 것으로 추청 되는, 경험에 기반"했다고" 주장되는 훈수를 무조건적으로 반감을 갖고 거르기 전에 "저 사람이 왜 저런 얘기를 할까?" 혹은 "저 사람이라면 어땠을까?"를 한 번 먼저 생각해 볼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 '그 사람'이 내가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나의 부모님이라면 더욱 가치가 있는 역지사지일 것이다.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부모님이 나 때에는 정말 어땠었을지 기억을 한 번 더듬어 보았다.




엄마 아빠가 나 만할 때의 기억


우리집은 처음으로 새 아파트에, '우리 집'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 같다. 신규로 들어서는 대단지에 진짜 우리집이라는 곳이 하나 생기다니.. 기껏해야 초등학생인 코흘리개 우리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엄마 따라 졸졸 그 집이 완성되는 동안 와따리 가따리 몇 번 했었고, 이렇게 휑하고 불 꺼진 곳들이 얼마 후면 그득그득한 사람들이 가득한 동네가 될 거라는 것이 상상이 안 가고 궁금해 죽겠었다. 아마도 꼬꼬마 애 셋을 정신없이 키우는 와중에 드디어 남의 집이 아닌 우리 집이 생기다니 부모님은 너무도 벅찬 느낌이었을 것 같다. 우리는 이삿짐을 옮기기도 전에 다 같이 텅 빈 그 집 마루 바닥에서 설렘을 이불 삼아 잠도 잤던 것 같다.


아빠는 전형적인 8~90년대 우리나라의 산업 역군으로서 온갖 후진국에 파견 나가 외화를 벌어 와 국가 경제 부흥에 일조하느라 정작 우리가 가장 귀엽게 재롱떨던 모습을 많이 놓쳤다. 캠코더도 비디오도 너무 비싸고, 유튜브는 원형조차 없던 그 시절, 엄마는 카세트 테이프에 우리의 목소리와 재롱, 그리고 그리울 고국의 가요를 녹음해 몇십 일 걸리는 바다 우편에 실어 보내곤 했다. 더운 나라 파견 시절 당시 귀하다는 바나나를 한 상자 귀국길에 선물로 가져다준 적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비싼 과일은 본적도 먹어본 적도 없어서 먹을 줄을 몰라 대부분 썩어 버렸던 것 같다. 아빠가 사다준 조개 목걸이가 난다는 그 더운 나라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궁금했지만 상상이 잘 안 갔다.


오늘날 한국 경제를 만든 산업의 역군


역사를 정말 좋아했지만 사학과는 밥 벌어먹기 쉽지 않다는 어른들의 얘기에 공대를 나온 우리 아빠는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품목 중 하나였던 발전소 엔지니어가 되어 방글라데시, 사우디 아라비아 등 당시에는 더욱 험지였던 곳들을 도전적으로 자원했다고 한다. 군대도 면제받을 정도로 약골이었던 우리 아빠는 따지고 보면 그때 기껏해야 대리 나부랭이나 되는, 조직의 어린 직원에 불과했지만 해외 파견 중 새까만 얼굴을 한 현지 직원들의 폭동 등에 맞서 목숨을 걸고 회사를 지켜내야 하는 일도 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좀 더 선진국에 파견 나가는 우아한 문과생이었다면 우리도 어린 시절 따라가서 견문도 넓히고 원어민이 되어 평생 더욱 편한 삶을 누렸을 텐데, 아빠가 가는 곳들은 도저히 어린애들을 달고 갈 수 없는 곳들이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회사에 입사를 하고 나서 점심시간, 회식 시간마다 아저씨 군단과 함께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하는 시간들이 난 좋았다. 몇 있지도 않은 또래 여자 애들은 그 시간을 회사 생활 중 대체로 불편하고 싫은 시간들로 여겼던 것 같은데 나는 오히려 즐겼던 것이, 그 자리가 2~30년 전 우리 아빠를 만날 수 있는 시간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차장 부장님들이 딸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마다, 본인은 다 닳아 해진 방석에 앉아 원하는 신발 하나 마음껏 못 사면서도 애들 선물 고민을 하는 걸 보면서 '아 우리 아빠도 저랬겠구나' 싶었다. 아빠의 젊은 날 사회생활이란 이런 것이었을 테다. 물론 그 당시 기억으로 아빠는 평일 저녁 일찍 들어온 적 없고 토요일은 무조건 출근이었으며, 어쩌다 쉬는 날이면 시체처럼 잠을 보충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요즘 쉽게들 예전 경제성장 시절 부모 세대가 꿀 빨더니 희망 없는 자신들에게 노력하라는 말이 듣기 싫다고 하는 것을 종종 보는데, 난 솔직히 그렇게 말하는 애들이 지금 이 시대에 당시의 우리 부모 세대처럼만 일한다면 뭘 해도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교육 강국의 토대를 만든 녀들


그때 그 시절 우리 엄마들은 어떻게 둘셋을 누구 도움 하나 없이 다 잘 키워냈을까? 굶기지만 않으면 다 알아서 큰다고 했던 그 예전 시절이 아니라, 여자 어린이는 피아노, 남자 어린이는 태권도가 필수가 된 지 오래이고, 갖은 학습지에 선행 학습이 이미 창궐하던 그 시절, 초등학생인 나에게 자정이 다 되도록 학습지를 다 풀기 전에는 잠 못 잔다고 다그치던 엄마가 있었다. 일찌감치 홀로 되신 외할머니 밑에서, 굽이굽이 시골길을 찾아 들어가 야밤에 건너편에서 자고 있는 뱃사공을 소리쳐 불러 강을 건너야지만 갈 수 있었던 그런 산골에서 자란 엄마는 학교에서 내내 반장과 1등을 하고도 대학은 꿈도 못 꾸었었다. 그런 엄마에게 나란 존재는 어쩌면 자신이 못다 한 꿈을 대신 이뤄주는 화신과도 비슷했을지 모른다. 많은 엄마들이 우리 엄마와 비슷했을 것이고, 카이 캐슬의 기반이 이 시절 만들어졌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 나이 때 엄마는 이미 엉망진창으로 쌈박질을 하기 일쑤인 초등학생 애 셋을 휘두르는 호랑이 엄마에 지역 사회의 리더십(부녀회장, 통장 등)에도 빠지지 않는 카리스마 있는 아줌마였지만,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외부의 확신을 갈구하는 여리고 불안한 30대일 뿐이었다. 양육기간 내내 부재했던 아빠 대신, 애들에게 오히려 엄마가 의지도 많이 했던 것 같다.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인 나에게 엄마가 운전할 때마다 주어지는 미션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눈 팔지 말고 길과 방향을 잘 보고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내비는 커녕 표지판도 엉성하던 그 시절 엄마는 진심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나의 조수 역할에 의지하며 먼 길을 나섰던 것 같다. 지금 이 나이에도 엄마는 여동생과 쌍으로 사소한 것을 쉽게 결정을 못하고 나의 단호한 판단을 물어보는 장면을 종종 마주하는데, 아마도 동생과 성격이 똑같은 엄마는 끊임없이 불안함을 안고 매 번 모든 것이 처음인, 좌충우돌 애 셋 독박 육아를 했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온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


기원전 파피루스와 함무라비 법전에도 똑같이 등장한다는 그 말,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들 너무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세대 간의 갈등은 항상 있어왔던 것 같고, 특히나 후대로 갈수록 늘 부족해 보이고, 예전엔 안 그랬던 컨센서스들이 깨지는 현상을 많이 보게 된다는 것 같다. 그런 만큼 인류는 또 새로운 혁신과 개선들을 이어왔을 것이고, 그에 따른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었다. 동시에, 인류가 다른 영장류와 달리 비약적인 문명의 발전을 겪었던 이유가, 우리는 기록을 할 수 있고, 그로부터 직접 다 경험해 볼 수 없는 것까지 간접 체험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인류의 대부분의 인구가 겪을 수 없는 초상위 일부 계층의 그들만의 세상에 대 공식적으로 기록된 역사 말고, 소소하지만 대부분의 우리가 느끼고 겪을 수 있는 역사를 기록하고 느껴보는 것이 어쩌면 실제적으로는 더 큰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개인적이지만 일반적일 우리의 평범한 부모님들을 한 번 떠올려보며, 그들의 그간 노고에 감사할 수 있는 따스한 어버이 날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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