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워킹맘의 한 저녁 일기
특별하다면 특별한, 평범하다면 평범한
오늘은 나름 특별하다면 특별한 날이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의 방을 빼는 날이었으니까. 마지막 날이 아직 며칠 남았지만 막날에 잔뜩 손에 지고 오기 싫어 정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하필 이번 주 남편은 지방 출장이라 자동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날. 예전에 직접 인쇄소에서 찍어낸 따끈한 책을 꾸역꾸역 운반했던 그 캐리어에 몽땅 쓸어서 낑낑거리며 늦은 버스를 타고 엄마 집으로 향한다. 다행히 내가 조금 늦는대도 전화만 미리 하면 얼마든지 기꺼이 손주를 봐주는 엄마가 있으니 나는 행운아 '금수저 워킹맘'이다 되뇌며 집에 온다. 심지어 엄마가 따끈히 차려놓은 밥까지 얻어먹을 수 있으니 나이 40줄에 나는 얼마나 행복한 자식인가? 엄마의 반찬은 지난주에도, 이틀 전에도 같은 미역국에 먹다 남은 같은 고기에 김치다. 엄마는 매일 이렇게 똑같은걸 먹고살고 있다니 괜스레 더 소화가 안된다.
그 사이 우리 애가 또 TV에 손을 대서인지 어제 내내 안방 TV가 안 나와 못 봤다고 엄마가 원성이다. 내가 가서 뒤의 코드 한번 뽑았다 다시 꽂았을 뿐인데 잘만 나오는구먼. 왜 이걸 한번 안 해보고 또 안된다고 하는 거냐고 투닥이는 그 짧은 사이에 우리 애는 또 이상한 것을 집어 먹고 있다. 뺏고 보니 더러운 자동차 키다. "이런 거 아무거나 빨아먹다가 지금 또 감기 걸려서 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나도 모르게 소리가 커진다. 오늘은 짐도 많고 하니 엄마에게 쓰라고 준 꼬맹이를 내가 몰고 가야 할 판이다. 엄마가 반바지에 마스크도 안 끼고 짐 들어주겠다고 같이 뛰어나온다. "아니 이런 차림으로 너무 춥고 지금 마스크도 없으니 빨리 들어가라고!!" 엄마는 기어이 그 꼴로 따라 내려와서는 짐 싣느라 바쁜 나 대신 울 아기의 벨트를 매어주고 옷을 여며주고 마스크를 씌워주고 한다. 빠빠이를 하고 출발을 하려는데 처음으로 본 경고 등이 뜬다. 연료 부족. 시뻘건 글씨다.
이 야밤에 아프고 졸린 아이를 데리고 나는 기름을 채우러 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내일 아침 엄마가 이 차로 두 살 아기 어린이집 등원을 시킬 수 있다. 오늘 모처럼 사무실 출근에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 안 그래도 눈이 뿌연 지경에 야밤 주유소 행이라니. 나는 사실 벌건 대낮이라도 기본적으로 운전을 정말 즐기지 않는 타입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눈을 비비며 거북이처럼 기어서 주유소를 찾다가 택시에게 빵빵이도 호되게 당한다. 그 와중에 뒤에 탄 아들은 중간에 마스크가 빠졌다며 끼워달라고 "마~마~~"한다. (아직 말을 못 하는 갓 20개월이다.) 신호 대기 타이밍에 급히 파킹을 넣고 안전띠도 풀고 겨우 손을 뒤로 빼서 뒤의 카시트에 탄 아이의 마스크 한쪽을 끼우고 무탈하게 액셀을 밟는데 이번에는 "으이야아아아"한다. 엄마가 어둠 속에서 대충 채운 안전띠가 완전히 풀려버려 양손에 들고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앞자리로 돌진하려는 아기에게 엄하고 날카로운 소리로 경고한다. "그 자리 가만있어!!!" 애도 놀랐는지 움찔하면서 안전띠도 풀려버린 카시트에 숨죽이고 바짝 붙어있어 줬다.
급한 맘에 불법 유턴까지 저지르며 겨우 사고 없이 주유소에 도착했는데, 사실 나는 셀프 주유라는 것이 처음이었다. 대체 뭐부터 해야 하는지 몰라 노즐을 들었다 놨다 이리저리 헤매는 중간중간 아이의 울음소리는 덤이다. 겨우 알아내어 평소처럼 삼성 페이 결제를 하려고 폰을 켜니 배터리가 2% 남아서 결제가 안된단다. 어쩌지 난 항상 폰만 들고 다녔는데. 잘 생각해보니 내가 비상용으로 엄마 쓰라고 차 속에 넣어두었던 '경차사랑 주유카드'가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결제를 기다리는데 한참 후에 오류라고 뜬다. 몇 번을 해보다 꺼내보니 하필 카드 유효기간이 21년 9월이 아닌가? 난생처음 카드 유효기간을 이런 때 맞이해보는구나. 허탈했다. 기름은 앵꼬고, 폰은 꺼지고, 카드는 끝났고.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또다시 애가 운다. 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아~ 기괴한 억지웃음을 한번 웃어 주고는 나의 짐 더미에서 라이언 모양의 쓰레기통 뚜껑 하나 찾아 정신 잠시 팔고 있으라고 쥐여준다. 그 와중에 번뜩, 아까 짐을 쓸어 담을 때 평생 안 쓰던 신용 카드 비스름한 것도 하나 본 듯하다. 그래, 그것이 오늘 나의 구세주였다. 짐 바닥을 헤집어 겨우 구세주를 만나 여차저차 겨우 주유를 하고 돌아왔다.
집에 오니 역시 나갈 때만큼이나 난장판이다. 쌓인 택배를 발로 밀며 짐을 질질 끌고 들어온 집에 보이는 풍경은 찾다 못 찾은 양말 한쪽, 씻지 못한 젖병, 닦지 못한 바닥 그리고 빨고도 못 갠 빨래들. 부엌에는 아기와 같이 아픈 바람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2인분의 각종 약봉지, 아침에 싸가려고 삶아 놓고도 두고 간 계란이 불어 터져 있었다. 애를 먼저 씻기고 우유를 물린 후에야 나는 겨우 씻을 수 있기 때문에 몸에서 물을 철철 흘리면서 분유도 타고 거기에 약도 타고 해야 한다. 원래 아이 손을 먼저 씻기고 잠시 혼자 물놀이에 정신 팔린 틈에 분유를 조제하는데 오늘따라 애도 더러운 채 온몸에 물을 질질 흘리면서 또 뒤뚱뒤뚱 따라 나온다. 아고야 미끄러지면 어쩔라고!! 이후 아기는 다행히 모처럼 고분히 목욕을 하고 평온히 우유를 먹어주어 내 샤워는 무사히 끝냈다만, 애가 자니 드라이기도 못쓰고 내 머리 말리는 건 포기다. 아기는 자면서도 계속 콜록거린다. 오늘 밤도 역시 연속으로 두 시간 이상 자긴 글렀구나. 이렇게 한 워킹맘의 밤은 저물어간다.
휴 그래도 오늘 하루도 결국 '큰' 일은 없었다. 그래, 그럼 나름 괜찮은 하루였던 게다. 오늘도 수고 많았다 셀프 토닥.
애는 또 금방 곧 기침을 하거나 우유를 찾느라 깰 텐데. 그 사이 틈이라도 번개 같은 쪽잠을 자 둬야 하지만 잠 마저도 쉬이 들기 어려운 어느 초겨울 밤, 아니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