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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물고기 Feb 19. 2023

세 돌, 어느새 나의 아기가 어린이가 되었다

너와 함께 내가 자란다

내일이면 벌써 우리 아기가 세상의 빛을 본 지 딱 만 삼 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에 내가 썼던 ‘시작하는 부모의 다짐’이라는 글이 있었는데 사실 잊고 살았다. 갑자기 그 글에 며칠 반짝 트래픽 유입이 급증하여 알고 보니 최근 삐뽀삐뽀 119 공동 저자인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정유미 선생님이 본인 유튜브 커뮤니티에서 참고로 읽어보라고 글을 소환을 하신 덕이었다. 그 김에 나도 무려 3년 전의 다짐을 다시 한번 꺼내보게 된 계기가 되었고, 다행히 아직 그 다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와중에 아기테를 벗고 최근 부쩍 어린이스러워진 우리 아들의 세돌 무렵의 모습과 요즘 드는 단상을 기록해 본다.


행복하고 사랑 많은 아이


우리 아들은 32개월 전후가 되니 하고 싶은 말을 거의 다 하기 시작했다. 사실 28개월 즈음부터도 내가 동요에 개사를 해서 노래를 부르면 그 동요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로 바꾸어서 응답을 하였다. 예를 들어 “엄마랑 XX이랑 집에 갈까~?”하고 부르면 “시러요 시러요 안 갈래요~” 혹은 “재미없으면 집에 가자 랄랄랄랄라~”하면서 대답할 가사가 다 떨어지면 랄랄라와 같은 것으로 운율 땜빵까지도 즉흥으로 지어내었다. 36개월이 다되어가는 요즘은 아예 처음부터 본인이 먼저 아무 노래에 하고 싶은 말을 넣어서 뮤지컬처럼 말을 걸기도 한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이 아이의 감정상태는 기본적으로 ‘해피’에 가까운 스타일이 아닐까 싶다. 혼자 있다가도 “랄라랄라라~”하며 흥얼거리거나, 좋은 것이 있으면 “와아 신난다!!”소리치며 긍정적인 감정을 마구 표출하는데 아낌이 없다. 정도 무지 많아서 몇 달 전에 딱 한번 만난 내 친구나 아이의 친구 엄마 등도 수시로 보고 싶다며 계속 얘기를 한다. 요즘도 하루에 몇 번은 반드시 한참 혼자 잘 놀고 있다가도 “엄마 안아줘요”하고 팔을 벌리고 달려오고, 나는 양손 잔뜩 설거지를 하고 있거나 화장실에 있다가도 그때만큼은 거절하는 법 없이 바로바로 안아주려 한다. “이 아이가 내게 이렇게 안아달라고 하는 날도 인생에서 몇 번이나 남았을까”하는 생각을 매번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거부할 수가 없다.


세상의 이치 그리고 본인의 이치


만 두 돌 즈음부터도 얼굴에 뭐가 묻어있으면 다가와서 “엄마 무더쪄”하고 입을 닦아주기 시작했었는데, 말을 잘하면서부터는 더욱 적극적이 되었다. 내가 물을 쏟은 걸 보면 티슈를 뽑아 들고 오면서 ”엄마, 내가 닦아줄게~“ 널브러진 레모나를 어디서 하나 집어 와서는 ”엄마 비타민 머거“하기도 하고, 33개월쯤 되면서는 내가 재채기를 하는 것을 보면 ”엄마 아파? 그러니까 내가 기침할 때 입 막으라고 해짜나아~!“하며 이제는 잔소리까지 하는 지경이 되었다. 뭘 하든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해서 본인 목마르다면서 “XX이는 물 머글래, 엄마는 옆에서 술 머거” 명령까지 해서 빵 터지기도 했다.


그리고 표현이 자유로워진 만큼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도 많이 파악을 한 듯하다. 아빠가 손 씻는 것을 보면 ”아빠는 뭘 머글라꼬 손 닦고 이쪄??“라며 다음 스텝을 유추하기도 하고, “XX이는 산타할아버지한테 뭐 받고 싶어?” 물어보면 시무룩한 표정으로 “XX이는 많이 울어서 선물 못 받아..”라며 인과관계도 이해를 한다. 장난으로 매운 것 먹어보라고 하면 “시여 싫다고! 난 어린이잖아!!”하면서 논리적(?) 항변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 그만큼 주관도 뚜렷해져서 원하는 바가 안되었을 때에 생떼도 심각하게 늘었다. 자기 전 목이 다 쉬어버리도록 한 시간, 이제는 한 시간 반까지도 정말 쉬지 않고 고래고래 울어버린다. 생떼의 이유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지가지 것들인데, 예를 들면 삼켜 버린 김을 내놓으라거나 다시 아빠보고 회사로 돌아가라거나 정말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이유들인데, 그래도 본인 기준으로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고 최대한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하고 지칠 때까지 내버려 두거나 주의를 돌리려는 편이다. (한 시간 넘는 엄청난 데시벨의 소리지름을 듣고 있는 게 실제로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아이라면 커가면서 다 그럴 때가 있을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너무 침소봉대하거나 걱정하지는 않으려 한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 천국


아직도 이유를 제대로 이해 못 한 아주 최근 몇 번의 생떼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아이를 관찰하고 아이의 입장에서 계속 생각해 본 결과 대부분의 경우는 본인의 호기심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에 가장 화가 많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저기 돌멩이가 더 궁금했는데 더럽다고 늦었다고 그 잠시 볼 시간을 안 주고 끌고 들어간다거나, 건너편 차가 지나가는 것을 좀 관찰해보려 했더니 춥다고 위험하다고 안고 데려가버리거나 등 본인의 궁금증을 해소할 여유를 주지 않았을 때에 가장 화가 치미는데, 그 꼬마가 할 수 있는 것은 고래고래 우는 것 말고는 없는 것이었다.


찾아보니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신기하게도 아주 비슷한 아이가 있었는데, 내가 스스로 내린 것과 같은 결론을 내려주었다. 거기서 말한 “탐구심이 특히 강한 아이”가 바로 우리 아이 었고, 잠을 자면 눈을 감아야 하니 탐구하지 못하는 게 싫어 잠도 잘 안 자려 한다는 것조차 같았다. 그런 아이에게는 호기심이 충족될 여유를 최대한 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나도 아이에게 더 많은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 내버려 두면 아이의 속도대로 궁금함이 가득한 세상을 얼마든지 탐구하고 탐험할 것이다. 뭐든지 꼭 손으로 직접 다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 호기심 많은 아이.. 그게 바로 나였기에 아이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 아이는 뭐든지 신기한 물건은 꼭 손에 쥐고 다녀야 할 정도로 나의 심화 버전이랄까.


나는 책이든 공부든 “누군가 가르치는 것을 배운다”는 개념으로 시작하기보다는 본인이 궁금해서 “스스로 학습하려는 관심과 태도”로 시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먼저 글자를 가르치려 하거나, 책 보자고 아이를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31개월이 되니 자기 전에 본인이 책을 읽고 자자면서 거실에서 책을 들고 들어온다. (자기 전 독서를 주입할 생각이 없어서 방에는 아예 책을 두지도 않았다.) 욕심은 많아서 매일밤 “딱 세 권만” 고르라는 내 말에도 “아니아니 많이많이”라면서 매일 많이 읽어달란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잔뜩 들고 들어오는 책은 아름다운 동화 세상이 아니라 몽땅 자연관찰 책이다. 그렇다. 별도의 사교육 없이 중학교부터 고3 학교 이과 대표로 내가 출전했던 종목도 늘 과학 경시대회, 그 중에서도 특히 생물이었다. 이 아이는 나를 너무 닮아있다.


특별한 아이 평범하게 키우기


아이 어린이 집에 젊고 당찬 담임 선생님과 경험이 아주 많고 노련하신 부담임 선생님이 계신다. 부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31개월쯤 되었을 때 하원하다 뵙게 되었는데 “이 아이 특별해요. 확실히 보통 이상이에요. 그 정도만큼 지금 원에서는 개별 맞춤 지도를 해줄 수 없어 미안해요. 똘똘하고 호기심도 많으니 한번 잘 키워보세요.” 하시는데, 기분이 은근 좋기도 했지만 한편 걱정이 되었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어릴 때 조금 똑똑하다는 소리 듣고 다들 특별 대우 해주어 아이를 되려 망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아무렇지 않은 듯이 아이들의 다름을 개성으로만 보고 완전히 똑같이 아이들을 봐주는 젊은 담임 선생님이 더 고마웠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이 어떤 발달 과정에 있건간에 딱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친구처럼 대해준다.


세상에는 무슨 영재가 그리 많은지 자기 아기 어릴 때부터 영재 검사를 해보고 특별하게 키우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기사를 찾아보니, 내가 의심했던 바와 같이, 몇십 년 전에 영재라고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추적 결과 결국 대학도 제대로 못 간 사람들도 꽤 많았고, 공부로 정말 잘된 경우는 일반인들 집단 대비해서 크게 비율이 높은 것 같지도 않았다. 아이가 상대적으로 조기 교육에 좀 일찍 노출이 되어 우연히 남들보다 조금 빨라 보이는 학습력을 어릴 때 보였다고 한들, 그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일까? 어떤 사람은 조금 일찍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느리지만 훨씬 더 멀리 간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를 바꾼 정도 급의 천재들은 오히려 후자가 더 많다.


진짜 인생을 바꾸는 차이는 스스로 오래 꾸준히 학습하려는 의지와 어디서든 배우려는 태도, 근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시작한 조기 영재교육은 오히려 자율적인 내적 동기부여를 방해하고, 어린 시절부터 익숙해진 특별 대우는 심지어 본인은 또래와 다르다는 우월의식까지 심어주어 인성에마저 독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가 평생 살아가야 할 세상은 좁은 영재원의 고만고만하게 ‘한때 공부로 조금 특출났던’ 아이들만의 집단이 아니라, 나보다 어떤 부분에선 더 잘나거나 못난 아이들도 가득한, 때론 겸손해지고 때론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도움 주고받기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그런 사회가 아닌가? 좁은 시험지 위에서의 평가가 세상의 전부가 아닌데 마치 그것이 제일 중요한 듯이 우리는 너무도 잘못된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닌지?



육아 휴직일 때는 월별로, 아이가 조금 커가면서부터는 그래도 두세 달에 한 번씩은 성장 일기를 남겼었는데, 이번에는 반년만에 써보는 육아 일기다. 그 사이에 아이도 폭풍처럼 성장을 했지만, 나의 커리어 반년동안 태풍과 같은 일들이 많았고 나 역시 성장을 하느라 인생 역대급으로 너무 바빴다. 아이가 커가는 만큼 내가 커가는 것 역시도 너무 중요한 일이다. 시작하는 부모의 다짐글을 썼을 때처럼 아이를 모든 세상의 중심으로 놓고 살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아이는 독립적이고 주도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하는 능력을 키워가며 클 것이다. 그것이 아이에게도 더 좋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다. 세상 많은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은 ”너 하나만 보고 다른 것들을 다 희생했는데 이게 뭐냐“라는 레퍼토리를 많이 보는데, 자식들은 단 한 번도 그렇게까지 하라고 한 적이 없다. 그들도 커서 그런 부담을 갖고 싶지 않을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능력닿고 무리되지 않는 선까지 원한다면 기회는 최대한 주되, 열심히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것을 ‘말’이 아닌 실제 ‘삶’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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