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던 것들
타임 푸어가 어떤 것인지 절실히 느껴지는 요즘이다. 연말에 회고 글을 하나 작성하지도 못하고 해를 넘긴 것도 근래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 같고, 연초 계획도 대대적인 시간을 들여서 제대로 세울 여유는 안 나서 조금씩 나눠서 액션 아이템들을 나열해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조금 더 집중적으로 정리했던 나의 시간 블럭은 출근하기 전과 퇴근 이후의 시간들이었다. 회사에서 배운 스킬 중에서 삶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목표는 최대한 SMART(Specific, Measurable, Actionable, Realistic, Time-bounded)하게, 즉 구체적으로 측정 및 행동 가능하며 시간제한을 두고 설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5-10분 단위로 구체적인 시간 계획을 촘촘히 짰다. 주중에서 내가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아침의 준비 시간 약 85분, 퇴근 후 엄마 집에서 데리고 와서 같이 씻고 자기 전까지 약 110분가량이 전부이다. 그 시간들 안에는 내가 매일 하루를 보내기 위해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들이 다음과 같이 들어있다.
1. 일어나서 따뜻한 보이차 한잔 마시며 안약 넣기 (5‘)
2. 유산소 + 근력 홈트 (10‘)
3. 세수, 화장 및 출근 준비 (10‘)
4. 사과 깎으면서 아이 우유 데우기 (5‘)
5. 어린이집 가방 챙기고 알림장 쓰기 (5‘)
6. 아이 깨워서 세수시키기 (10‘)
7. 요구르트, 사과 먹이면서 옷 입히기 (15‘)
8. 양말, 외투, 신발 등 나갈 준비 (5‘)
9. 엘베, 주차장, 시동 걸고 벨트 매 주기 (7‘)
10. 우유 먹이면서 엄마집으로 이동 (8‘)
11. 주차하고 벨트 풀어주고 엄마 집 올라가 데려주기 (5‘)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한 85분간 수행해야 할 미션이 최소한 11 스텝 이상 되는 아침 스케줄 중에서 실제로 아이의 눈을 마주하면서 제대로 대화할 시간은 확보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내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다고 한들 변수는 역시나 새해 첫 영업일부터 발생했다. 아이는 일어나야 할 시간에 일어나기는커녕 잠이 와서 도저히 어린이집을 갈 수가 없다며 30분 넘게 울며불며 떼를 쓰고 드러누워버렸다. 11개의 스텝 중에서 6번으로만 남은 시간을 다 소진해 버린 것이다. 어른도 그럴진대 아이도 컨디션에 따라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기 싫은 날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 머리로는 잘 이해하지만 그 뒤의 일정이 차질받으면 나의 나머지 일정, 즉 워킹 라이프가 줄줄이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어지자 나는 초조하고 화가 나고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피곤하다는 아이 앞에서 눈뜨면서부터 소리를 지르고 혼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른 아침 회의는 미국에서부터 있어서 화상 회의이거나, 어린이집 원장님의 죄송하고 감사한 배려로 아이를 픽업하러 엄마집 대신 우리 집 앞으로 와달라고 급 부탁을 하거나, 정 급하면 엄마가 추운 아침 길을 달려오거나 해서, 매우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어찌어찌 어떤 방식으로든 굴러는 가고 있지만 하루아침이라도 순탄하게 맘 편히 계획대로 시작하는 날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아이는 등원을 했고 나는 출근을 했다지만, 맘 라이프를 잊고 깔끔히 커리어 우먼의 워킹 라이프 모드로 완전히 변신할 수 없는 때도 많다. 때로 하루에 각종 크고 작은 미팅을 10개 넘게도 소화해야 할 정도로 중간에 화장실 가기도 쉽지 않은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중간에 어린이집 선생님이 연락 오는 일도 꽤 있다. 당연히 나는 거의 제때에 받은 적이 없고, 나중에 다시 전화드려보면, “어머니, XX이만 오늘 누구 생일잔치 선물을 안 보내셔서 전달식을 못해 줬어요”, “행사 다과 뭐 보내실지 오늘 중으로는 꼭 알려주세요”, “오늘 친구랑 장난치다 친구가 넘어졌어요”, “성탄 카드 아직도 안 보낸 것 잊지 않으셨죠? 내일까지이긴 한데 다른 친구들은 이미 지난주에 거의 다 받았는데 XX이 주머니에는 아직도 없네요..”등등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심지어 성탄 카드의 경우에는 연말 회식 가는 길에 살짝 빠져나와 사무용품 파는 데에 겨우 들러서 구색을 맞추고 추운 길거리에서 카드를 써야 할 지경이었다. 한 번은 엄마가 집에 안 계신데 나는 회의가 예정보다 너무도 늦게 끝나는 바람에 하원 차량은 오고 있는데 받아줄 보호자가 없어 아이가 혼자 길바닥에 나앉을 뻔 한 일도 있다. 아기 때 얼굴 딱 한번 보여준 친구에게 급 SOS를 쳐서 극적으로 상황을 겨우 모면한 적도 있다. 아이가 열이 오른다고 갑자기 조퇴라도 시켜야 한다고 긴급 전화가 오는 날에는 정말 울고 싶을 때도 있다.
회사에서 전투와 같은 공식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최대한 아이와 있는 시간만큼은 일을 분리하려고 하니 회사에서 업무를 최대한 많이 쳐내고 와야 한다. 6시까지 미팅으로 꽉 찬 하루를 보내고 그때부터 쌓여있는 메일들을 체크하고, 오늘까지는 회신해야 하는 작업들을 하다 보면 아무리 초집중을 하고 속도를 내어도 아이를 데리러 엄마 집에 도착하면 빨라도 8시~8시 반이 된다. 엄마 찬스에 감사하며 저녁을 한 숟갈 얻어먹고 무조건 늦어도 9시에는 집을 나서려 서두르지만, 아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떼를 쓰며 할머니집에서 계속 TV를 보며 더 놀겠다고 드러누워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나는 어르다가 안되어 또다시 화를 내고 협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마는 시나리오로 종종 귀결된다. 소아과 선생님이 권장하는 취침시간은 8시 이전이다. 당연히 그건 불가능하더라도 9시 이전에는 집을 나서야 그나마 11시 이전이라도 재워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매일 조바심이 난다. 우리 아이는 잠을 많이 못 자서인지 키가 또래 평균대비 하위 15프로 미만인데, 소아과에서는 무조건 잠을 많이, 그리고 일찍 자야 큰다고 강조를 한다. 귀가하는 밤 스케줄 역시 나는 호기롭게 촘촘하게 세워 두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제시간에 착착착 클리어하려면 결코 만만치가 않다.
1. 우리 집으로 이동해서 겨우 주차공간 찾아 주차하고 올라가기(15‘)
2. 옷 벗고 아이 벗겨주고 정리(5‘)
3. 아이는 물놀이시키면서 화장 지우고 샤워(15‘)
4. 아이 씻기기(10‘)
5. 나와서 닦아주고 스킨, 로션 등 같이 바르기(5‘)
6. 머리 말리고 말려주면서 스쿼트 하기(10‘) 그 사이 만 세 살이 되면서부터 아이는 혼자 옷을 다행히
야무지게 잘 챙겨 입는다.
7. 아이 철분약 챙겨주고, 아이가 내 루테인, 오메가 3, 빌베리 하나씩 먹여주기(5‘) 본인이 해야 할 일로 생각해서 내가 잊은 날에는 먼저 챙겨주고, 행여라도 내가 혼자 날름 먹어버리면 난리가 난다
8. 우유나 귤 등 간단한 간식 주고, 나는 알림장 꺼내고 식탁 매트 빨고 식기 설거지하며, 책 고르게 하기(5‘)
9. 또 잔뜩 들고 온 책을 딱 세 개만 고르라고 실랑이하기(5‘)
10. 책 세권 읽어주고 본인이 다시 스스로 복습(?) 하기(20‘)
11. 같이 양치질하고 일곱 번 물로 헹구기(10‘)
12. 같이 가습기 물 채우고 수면팩과 립밤, 핸드크림 바르고 잘 준비(5‘)
이 루틴을 다 채우고 나서 또 결국 시계를 보면 11시가 다 되어버린다. 중간중간 아이는 장난감에 정신이 팔리기도 하고, 책을 더 봐야 한다고 떼쓰기도 하고, 계속 꼬리에 무는 질문들을 이어가지만 나는 “오늘만은 무조건 11시 전에는 재워야 할 텐데“라는 생각에 늘 초조하고 분주하다. 아무리 각 미션들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완수하고자 계속 푸시를 해도 결국 자려고 시계를 보면 또다시 벌써 11시라니.. 이미 졸린 시간을 넘겨버린 아이는 불을 끄고도 잠이 쉬이 들지 않는다. 계속 물을 달라거나 혼자서 깜깜한데 뒹굴어 다니거나 심지어 조용히 엎드려뻗쳐 자세를 하면서 잠 오지 않는 스스로를 달래기도 하고 있다. 그러니 다음날 아침의 못 일어나는 떼쓰기가 다시 예고된다. 매일매일 눈 뜨기 시작하면서부터 잠드는 그 순간까지 마치 러닝머신에서 위에서 시간에 쫓기는 채 계속 달리고 있는 기분이다.
많은 시간을 그냥 같이만 보내는 것보다 짧더라도 퀄리티 있는 시간을 인텐스 하게 나누는 것이 아이에게 더 좋은 영향이 있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워킹맘인 것을 결코 미안해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아이를 가지기 전부터도 다짐해 왔다. 나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일환으로서 내 역할을 하는 것 역시 나라는 인간의 중요한 효용가치이자 충분한 쓰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이와 평일에 함께하는 매일 200분의 시간 중에서 아이의 눈을 바라보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퀄리티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자기 전 책을 읽어주는 20여분 남짓한 시간밖에 안 된다는 것은 여전히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나마도 아이가 떼를 쓰느라 앞의 단계에서 시간을 더 잡아먹게 되는 경우는 이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책 읽는 시간이 ‘의무’가 아니라 말을 순순히 잘 들었을 때야만 가질 수 있는 ‘보상’처럼 주어지는 기회인지라 그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책에 더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당연히 나를 위한 책을 포함한 어떤 형태든 컨텐츠를 소비하거나 심지어 뉴스 기사 한 줄 읽을 시간 따위는 빡빡한 하루 일정 사이에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잠시라도 틈이 허락된다면 나는 계절마다 커가는 아이의 옷을 새로 주문하거나, 아이반 친구 생일 선물을 사고 포장을 하거나, 떨어진 우유를 주문하거나, 아이가 할만한 활동이나 프로그램을 알아보기에도 바쁘다. 몇 달 만이라도 이 글은 어떻게 하나 완성했냐고? 그나마 오늘은 아이가 할머니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또 떼를 썼는데 엄마가 자고 가라고 하여 집으로 같이 오지 않았다. 더 이상 취미도 개인 여가라는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나는, 이런 틈에 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짬짬이 글이라도 써두려고 한다. 사실 이조차의 짬이 있어도 여전히 일말의 에너지가 남아있는 날이나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나의 개인의 기록이라기보다, 이런 상세한 기록들조차 남겨지기 어려운, 세상의 많은 현실 워킹맘들의 하루에 대한 스냅샷 정도가 되겠다.
그래도 아이는 너무 사랑스럽고, 아이가 볼에 뽀뽀해 주고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것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긴 하루 중 없었다. 그거면 오늘도 충분하게 보람찬 하루를 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