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한 인간의 성장 기록
우리 아이는 만 세 살 반정도 되니 어떤 기질과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인지 꽤나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훨씬 더 어린 시절부터 짐작할 수 있었던 것도 있었지만, 이제는 신체와 언어의 제약이 전혀 없어지고 나니 뚜렷이 보이는 것들이 꽤나 많아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정말 타고난 ‘변치 않는’ 기질인 것인지, 아니면 한 때 스쳐 지나가는 성장의 과정인 것인지 기록을 남기면서 나도 배워가고 싶다. 이것은 만 세 살 반에서 네 살 사이에 내가 아이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의 기록.
- E 그리고 J
선생님과 친구들을 너무도 좋아하고 새로운 환경에 설렘을 느끼고, 어떤 순간에도 자기주장을 시끄럽게 펼치는데 거리낌이 없으며, 발표든 시범이든 제일 먼저 손들고 나서서 하는 것을 즐긴다. 엄청난 개구쟁이에 감정, 특히 좋은 감정은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밖에 나오니까 너무너무 좋다!” “이 친구랑 노니까 정말 재미있다!” “선생니임~~ 안아주세요!!”와 같은 표현을 아낌없이 끝도 없이 한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무조건 밖에 나가야 하니 늘 주말이 다이내믹하다. 남편의 A형이라 내향형으로 가득 찬 남편/시가 쪽 성향일 줄 알았는데 거리낌 없고 솔직한 나와 같은 외향형이 거의 확실하다. 온갖 체육 활동을 좋아하고 (우리 부부와는 달리 소질도 있다고 듣고), 두 살 때부터 태권도가 배우고 싶다고 하더니, 이제는 스케이트, 축구 등 보이는 종목은 족족 다 배우고 싶단다.
남편과 나는 자유분방한 P 쪽인데, 이 아이는 계획적이고 철저한 J임이 분명하다. 세 살 반 정도부터는 외출하게 되면 “엄마 핸드폰은 챙겼어? 차 키는??”하며 나의 준비상태를 본인이 점검해 주기 시작하더니, 우리 엄마에게는 저녁마다 “할머니 약 먹었어?“하면서 때 되면 영양제를 잊지 않고 챙겨준다. 42개월쯤 둘이 기차를 타러 가는데, 여유가 있어 밖에서 어슬렁거리며 늑장을 부렸더니 당장 기차를 타고 미리 들어가 앉아 있어야 한다며, 기차가 떠나버려서 놓치면 어떻게 하냐고 불안해하면서 울고 난리였다. 나는 기차라는 것을 놓치면 어떻게 된다는 얘기를 해 준 적도 없고, 맨날 간당하게 가면서도 (심지어 살면서 놓쳐본 적도 있어도 여전히) 늘 걱정 없는 모습만 보여줬고, 이 아이는 기차를 놓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경험을 해본 적도 없는데 왜 그리 걱정인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 호기심 많고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말문이 트면서부터 아이 치고도 말이 정말 많고, 특히 온갖 질문을 쏟아내느라 쉴 틈이 없다는 것을 느낀 건 나뿐 아니라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말이 많은 스타일인가 보다 했는데, 실제로 다양한 것들에 호기심이 많아 뭐든 배우는 것 자체를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뭔지도 모르고 무료 체험이라며 교보에서 문자가 오길래 ’어떤 것인가 들어나 보자‘며 쉽게 슈퍼브이 체험이라는 것을 신청한 적 있는데, 와서 설명을 들어보니 ’학습 패드로 혼자 게임하듯이 공부하는 것‘이라고 하기에, 체험 팩을 며칠이 지나도록 아예 뜯어보지도 않고 되돌려 보낸 적이 있었다. 당연히 설명해 주러 오셨던 분은 아이에게는 수업은커녕 말도 거의 않고, 나와만 길지 않은 대화를 하고 돌아갔었다.
그런데 아이는 그 사건을 가지고 오해를 하여 다음날 어린이집 선생님들에게 “이제는 방문 선생님이 오시기로 했다”며 너무 재밌고 신나겠다고 자랑을 엄청 하고, 그래서 본인은 “오늘부터 일찍 하원해서 집에 가야 하니 미리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역시 J) 부산을 떤다며 전화가 왔었다. 방문 학습지를 벌써부터 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아이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부랴부랴 알아보고 얼떨결에 만 네 살 직전에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 세 달째 세 과목을 아직까지도 계속 신나 하면서 잘 듣고 있다. 이제 그만할까 매번 물어보면 절대로 계속하겠단다. 아직은 학습보다는 놀이를 했으면 하기에, 조금이라도 즐겁지 않다면 언제든 학습지는 그만둘 준비를 하고 있다.
- 언어와 로봇에 흥미가 있다
만 세 살 반이 지나니 글씨를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엄마 저기도 동물원이야?” 뭔 소린가 했더니 지나가다 저 멀리 “동문”이라는 글씨를 보고 물어본 것이었다. 지난주 동물원에서 동문을 본 것이 생각난 것인지, 헷갈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글자를 파악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이후로는 ”여기 빨간색, 파란색 써있네. 노란색은 왜 없어?“라든지, 읽어준 적 없는 책을 들고 와서 “오싹오싹 화성 탐험, 이거 읽어줘“라며 알려주지 않은 글을 쓰인 대로 읽어내는 빈도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의 핸드폰이 울릴 때 남동생 이름이 뜨는 걸 보고 “할머니, 삼촌 전화~”라며 해석해서 갖다 주기 시작했다.
나는 이성적으로 글자를 ‘읽어내는데’ 정신이 팔리기보다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먼저 ’보고 느낄‘ 줄 아는 감성적인 아이로 키우고 싶은 유럽적 마인드로, 글씨를 알려주거나 글자를 아는지 질문한 적도 여태 한번 없었다. 본인이 흥미를 가지고 스스로 깨우치는 것은 말리지 않겠지만, 여전히 학습을 시킬 생각은 없어서 삼 년 전부터 선물 받은 글자판은 여태 한 번도 꺼내지도 않고 있다.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로봇이니, (발음을 잘 못하던 애기 시절부터도 “로고트, 로고트”하며 좋아했다) 어쩌면 이 아이는 이성적인 공학도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만 세 살 기념 어린이날 선물로 가장 받고 싶은 것도 로봇 ”장난감“이 아니라 진짜 AI로봇 알파 미니였다. (물론 안/못 사줬다.)
- 떼쟁이, 협박쟁이, 감정의 격변기
아이라면 그럴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고집이 정말 세고, 한번 떼를 쓰면 자기주장을 좀처럼 굽히질 않는다. 만만치 않은 성격의 나 포함 각자 개성 뻗치는 애 셋을 키워낸 우리 엄마조차도 이건 여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급이라며 혀를 내두른다. 더 어릴 때부터도 요구 관철이 되지 않으면 한 시간 반까지도 쉬지않고 고래고래 우는 것을 많이 겪었는데, 이제는 그나마 요령이 생겨서 관심을 최대한 빠르게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최선임을 알게 되었다. 원하는 것을 안 해주면 협박도 정말 잘하는데, 평소 하지 말라고 했던 것들을 기가 막히게 다 기억했다가 정확히 반대로 말한다. “이거 안 해주면, 난 빨간 불일 때 찻길에서 뛰어갈 거야.”와 같은 주의사항들을 온갖 협박성 멘트로 치환시키는데 달인이다.
세 살 반에서 네 살로 넘어가면서 “네 엉덩이랑 책에 나오는 아람이 엉덩이랑 똑같이 생겼다.”고 하면 엄청 수줍게 웃으면서 부끄러워하고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어느 시기에는 마음대로 안되면 감정적으로 서러워 눈물부터 질질 흘려 이춘기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엘리베이터 타면 혹시라도 누군가 비상벨을 누르지는 않을까 노이로제에 가까운 포비아가 생겼는데, 절대 누르지 말라고 한 달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당부하기도 하였다. 본인이 화가 났을 때 “엄마는 똥 먹어!”소리친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아예 장난으로 승화시켜서 둘이서 “그럼 넌 코딱지 쿠키 먹어” “그럼 엄마는 똥 케이크 먹어”와 같은 우리만의 끝도 없는 더러움 대잔치 말장난 놀이 레퍼토리를 만들기도 했다.
아이는 종종 자신이 이다음에 크면 어쩌고 하는 얘기를 많이 한다. 자동차 와이퍼가 신기했는데 내가 원하는 만큼 안 보여 줄 때는 “나는 이다음에 크면 내 마음대로 앞에 있는 와이퍼, 뒤에 있는 와이퍼 마구 왔다리갔다리 움직일 거야.“하더니, 그다음에는 ”나중에 크면 내가 운전하고, 아빠는 내 옆에 타고, 엄마는 내 뒤에 태워줄게~“라며 점점 포부가 커진다. 네 살이된 요즘은 맨날 ”유치원 졸업하면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하면서 쭉쭉쭉 상상 속에서 이미 대학도 졸업하고, 벌써 마음은 회사까지 가 있는 지경이다. 분명히 이 아이는 나와는 달리 멀리 그리고 미리미리 계획하는 성격인가 보다. 이 아이가 크면 어떤 모습일까? 지금 상상이랑 비슷할까? 점점 더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