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 찬란한 너의 시간을 간직하기 위한 글
6개월에 한 번은 꼭 쓰는 아이의 성장 일기를 쓸 시간이 돌아왔다. 예전 아기 때만큼 자주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일은 줄어들고 있고, 물론 그때만큼 성장곡선이 가파르지도 않다. 매일 비슷해 보이는데 어느 순간 훌쩍 키가 커있고, 키보다 더 훌쩍 생각이 크고 있음에 놀랄 일들이 생긴다. 모든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고 아쉬워 다 담고 싶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그래도 절대로 놓치지 않고 싶은 그 시절 특징적 요소들은 꼭 기록에 남기려 한다.
1. 생각 주머니
만 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생각 주머니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것을 훅훅 느끼는 때가 더 자주 있는 것 같다. 어느 날은 아이가 늦잠을 자서 아침에 실랑이하다 유치원에 직접 차로 등원을 시켜주는 길이었다. 내리려고 하는데 아이가 갑자기 하는 말에 내 귀를 의심했다.
"엄마, 나 키우느라 힘들지?"
TV를 보다가 CF나 드라마에서 이런 말을 들은 것일까? 이것이 다섯 살짜리가 할 질문인 것인가? 순간 많은 생각과 왠지 울컥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나는 오히려 오버스럽게 톤까지 업하면서 더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니?? 엄마는 우리 아들 키우느라 하나도 안 힘들고 너무 행복한데???"
진심이었다.
그 외에도 이제는 논리가 생겨서 나에게 바락바락 대들기도 잘하고, 나를 평가질하기도 한다.
"어른이 아이한테 그렇게 소리 지르고 하는 게 어딨어? 어른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엄마도 잘못한 거야!! “라며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혼내는 나를 되려 나무라기도 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안 들어줬다고 "엄마가 나를 책임지고 키워줘야 하는데 이렇게 제대로 원하는 것도 안 들어주는 게 어딨어!"라며 나의 역할을 본인이 규정하기도 한다. 때로는 "엄마, 할머니한테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라면서 적나라한 현실 딸과 엄마 간 대화에서 일상적이고 습관적으로 언성을 높였을 때 내게 반성의 기회를 주기도 한다.
저녁 늦게 남동생이 엄마집에 들를 거라는 통화를 들은 아이가 우리도 더 있다가 삼촌을 꼭 보고 가야 한다고 완강히 떼를 썼다. 이미 늦었으니 우리는 우선 가고 삼촌은 다음에 보자고 했더니 울며 불며 떼를 쓰며 하는 말이 "나 올해 5살 되고 나서(그 사이 생일 지났음) 삼촌 아직도 못 봐서 꼭 봐야 해!!" 더 이상 4살이 아닌 5살이 되면 또 얼굴을 한번 봐야 하는 거라는 논리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의 주관과 나름의 논리가 꺾기엔 너무도 확고했다.
2. 배려 주머니
"엄마 사실 나 그때 너무 힘들었어.."
프랑스 친구 가족네가 놀러 와서 하루 종일 강북을 걸어 다니면서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느라 뺑뺑이를 돌았던 적이 있다. 아이가 군말 없이 잘 따라다니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그러는 것이 아닌가? 쫓아다니느라 다리가 너무 아프단다. 생각해 보니 이 아이의 역사상 세상에 태어난 이래 하루 종일 그토록 많이 걸었던 적이 없었다.
만 5세 어린이날 기념으로 도쿄 디즈니랜드를 갔다 왔었다. 첫날에 폭우가 쏟아져서 우비에 각자 우산을 하나씩 쓰고 온종일 걸어야 했고 아이도 그 상황에 한 번 보채지도 않고 잘 따라다닌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다리도 삐었는지 다음 날은 거의 걷지를 못하는 상태였다. 다행히 유모차를 가져가서 둘째 날도 즐겁게 종일 잘 놀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온 후 한참 뒤에 "도쿄 디즈니랜드 어땠어?" 했더니 예전에 언젠가 들어봤던 말을 했다. "엄마 사실 나 그때 너무 피곤했어.." 엄마 말대로 이 나이에 해외 놀이공원은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좋은 휴가처는 아니었나 보다.
"엄마, 우리 경비 아저씨도 아이스크림 하나 갖다 줄까?"
아이랑 너무 더운 날 하원길에 '우리 빨리 올라가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자!'며 신나 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아이가 조심스레 내게 말을 꺼냈다. 솔직히 엄마 집 경비 아저씨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아이와도 그렇게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먼저 아저씨도 더울 것 같다며 그런 얘기를 꺼내다니. 게다가 본인이 그렇게 아끼는 아이스크림인데! 벌써 나보다 네가 훨씬 낫구나.. 막상 직접 건네주라니 정작 아주 쑥스러워했다.
3. 창의 주머니
"이데수엠~"이라는 말을 어느 순간부터 하기에 그게 뭐냐 물어보니 "이건 아주 실망했다는 뜻이야."라며 본인이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 원 콜렉스톤을 먹을 자격이 있어."라기에 콜렉스톤이 뭐냐니까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나 골라 선물 주는 보상을 뜻한다고 했다. "이제 콜렉스톤 장난감도 만들었어."라며 본인이 원하는 장난감을 살 수 있는 권한이 생겼다며 계속 혼자만의 언어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소리범벅 하지 마! 시끌버끌하지 마!"라며 뭔가 진짜 있었나 싶을 만한 단어도 아무렇지 않게 생성하기도 한다.
시어머니가 방앗간에서 직접 짜주신 참기름은 신문지에 싸여있었다. 그 신문지를 둘러서 빨간 노끈 같은 게 묶어져 있었는데 아이가 보더니 "이건 뭐야? 이 끈은 왜 있는 거야?"하고 또 꼬치꼬치 묻는다. 나는 역시나 이과적이자 전형적인 T적으로 “할머니가 참기름을 방앗간에서 짜서 줬는데, 기름이 손에 묻을까 봐 신문지로 싸고, 신문지가 떨어질까 봐 끈으로 묶은 거야." 했더니 아이가 아니란다.
"엄마 아니야 그건. 이건 선물이라서 빨간 끈으로 포장해 묶어준 거야."라며 나에게 한 수 가르쳐준다.
"아 그런 거였구나. 그러고 보니 진짜 선물이네~"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를 이렇게 발전시켜나가고 있는데, 사실 모든 게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업을 하는데 아이가 너무 혼자만의 생각을 골똘히 하느라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 못 듣는다거나, 선생님의 가이드 설명에 집중하지 않아서 다음 해야 할 일을 놓치기도 한다는 피드백을 들었다. 수업에 ‘집중력이 약한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혼자만의 생각에 너무 집중해서 ‘주의 환기가 약한 것’인지 조금 헷갈리는 지점들이 있었다. 아이가 크는 과정을 면밀히 살피고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놓치지 않고 적절한 때에 적절히 개입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4. 성격 주머니
아이는 어려서부터 극도의 P인 나와는 너무 다른 J적인 성격으로 나를 종종 놀라게 했는데, 철저함을 추구하는 만큼 겁도 많고 걱정도 상당히 많은 스타일이다. 아직도 집 안에서라도 내가 시야에서 한동안 안 보이면 "엄마!! 무서워!!!"하며 꼭 근처에 있어 달라고 하고, 이가 흔들릴 때도 무섭다며 엉엉 울면서 하원했다. (그 새 이를 벌써 두 개나 뽑았다!) 어른도 안 하는 걱정들을 본인이 혼자 사서 하는 경우도 있고, 모래시계나 카운트다운으로 시간 압박을 주면 그 자체를 너무도 큰 스트레스로 느끼는 듯하다.
기저귀도 이젠 오줌 안싸니 그만 차자고 해도 본인이 확신이 들 때까지 차고 자서, 네 살까지도 밤 기저귀를 찼던 것도 비밀 아닌 비밀이다. 결국 본인이 이제는 기저귀 없이 잘 수 있다고 해서 뗀 뒤, 여태까지도 단 한 번도 오줌 실수를 한 적이 없다. 나는 평생 물건 사고 매뉴얼이라는 것을 먼저 한번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아이는 무엇이든 매뉴얼을 먼저 공부하고 이해한 다음 조립을 한다. 깨알같이 쓰여 있는 칫솔 살균기 매뉴얼도 제일 먼저 펴고 공부하더니 "엄마 이건 나중에 배터리가 없으면 빨간 불이 들어올 거야"라며 알려준다. 혹시 몰라 한번 펴보니 그림이나 색깔 하나 없이 검은 글씨로 '적색등'이라고만 쓰여있는데 이것을 빨간불로 이해하고 내게 알려준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둘째 생각이 없냐는 질문을 가끔 들으면 나는 매번 주저하지 않고 "없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으레 "애 키우는 게 너무 힘들지?"라는 반응인데, 솔직히 나는 인생의 다른 과업에 비해 애 키우는 게 유별나게 더 힘들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힘듦보다 행복이 훨씬 큰 몇 안 되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동을 유지하고 싶은 이유는, 영원히 이 아이가 나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my one and only) 내리사랑이어서 평생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전부 다 주고 싶기 때문이다. 다른 그 누구에게 조금도 나눠주고 싶지가 않다.
혹자는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지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이과적인 T형 사고를 하는 나로서는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내가 평일 기준 하루 중 아이에게 온전히 집중해서 나눠줄 수 있는 시간이 거의 다 합쳐도 실제로 1-2시간이 채 안되는데, 대상이 둘이나 셋이라면 이미 ‘물리적으로도’ 그 시간들을 당연히 쪼개야만 하기 때문이다. 특히 멀티 태스킹이 약한 나는 누구에게 신경을 하나 쓰면 당연히 다른 아이에게는 그동안 집중을 못한다. 그러면 1시간마저도 아이당 30분도 채 안될 수밖에 없고, 심지어 그마저도 ‘철저하거나 공정하게’ 분배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냥 나는 내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시간과 물리적 자원을 이 아이에게만 온전히 후회 없이 다 주고 싶다. 그래봤자 아이가 내 품 안에서 내게 시간을 허락할 시간은 정말 얼마 남지 않음을 매일 느끼고 있다.
언젠가 삶의 끝자락에서는 이런 말을 온전한 정신으로 직접 해 줄 기회가 허락될까?
“너와 함께 나누었던 그 모든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다.
엄마의 아들로 와주어서 고마웠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