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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물고기 Apr 14. 2020

신생아가 내게 던져준 단상들

철학적이거나 말거나

일생에 많아야 한 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정말 특별한 기회, 집중적인 신생아 전업 육아를 거의 24시간 전담하는 상황에 놓인 요즘, 정말 새로운 것들을 보고 느끼며 인간과 생명의 성장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드는 단상들. 특히 이 아기가 나의 어린 모습을 그대로 복사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나와 닮아 있어서 더욱 많은 생각이 들게 되었다.

 


#복제인간


어쩌면 이 아이는 나의 복제인간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상당히 많다. 사진을 찍어볼 때마다 이 사진이 약 38여 년 전에 찍어 빛바랜 나의 갓난아기 모습과 도플갱어 수준으로 너무나도 똑같아 보일 때에는, 내가 당시 스스로의 모습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객관적인 기계의 증언에 따라 우린 같은 모습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우렁찬 목소리, 다른 것은 적당히 둔감해도 배고픔은 조금도 참지 못하는 성향까지 같은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보고 있는 이것은 나의 다른 버전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꾸 들어서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의 아이는 나의 복제인간이 맞다. 50퍼센트의 복제인간. 나의 DNA를 반, 배우자의 DNA를 반 섞어서 만들어진 혼합 복제인간이지만, 그는 우리와 전혀 다른 별개의 유기체이며 인격체이다. 아마도 마찬가지로 생명과학 기술이 더 발전하여 실제로 완벽한 복제인간을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그 50퍼센트가 100퍼센트가 된다고 하더라도, 생성된 복제인간 역시 마찬가지로 전혀 별개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는 모체의 종속인도 아니고, 거울도 아닐 것이다. 우리의 자식 역시 그렇듯이.


#타임머신


깜깜한 밤에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거나 울며 발버둥 치고 있는 아기를 안고 있으면, 나는 그 아이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 38년 전의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도 그때에 나의 엄마는 이런 기분이었겠지. 밤에도 낮에도 나와 같이 울고 웃으며, 갓 세상에 나와 버둥거리는 나를 밤낮없이 안아주고, 얼러주고, 먹여주고, 똥오줌을 치워주고 있었겠지. 다만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은,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10살 이상 어리고 여렸으며, 인터넷이라는 늘 열려있는 바깥세상과 연결된 것도 없을 때라 오롯이 혼자 시간의 섬에서 나와 정말 1대 1로 씨름하며 시행착오를 겪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확신을 갈구하면서 하나씩 쌓아나갔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환경이 그렇듯이, 특히 육아의 환경은 생각해보면 엄마 때와 지금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하루에 많으면 스무 번도 갈아야 하는 기저귀들, 뜨거운 물도 안 나와 매번 물을 끓여야 했던 열악한 수도 시설, 아기가 아프거나 어려운 상황이 되어도 딱히 당장 자문을 구할 데도 없는 고립된 시스템, 로봇 청소기나 식기 세척기, 타이머 장착된 오븐 등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그 시절, 그 어린 우리의 엄마들은 어떻게 여럿을 낳고 키웠을까. 그로 인해 얻은 만성적인 관절염, 디스크, 신경통 등은 평생의 동반자처럼 달고 같이 늙어가고 있다. 그런 엄마들이 이제는 그들의 자식이 자식을 키우기 어렵다고 40년이나 지난 후에 그런 만성 질환과 노환을 동반한 채 또다시 육아 뛰어드신다.


#공수래공수거


신생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 키워보니, 단지 꼬물거리기만 할 뿐인 이렇게 불완전하고 연약한 생명체가 세상에 또 있나 싶다. 눈은 잘 보이지 않고, 이는 하나도 없고, 머리털도 많지 않고, 손발이 있으되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귀가 있되 말을 못 알아들으니 귀머거리에 가깝고, 입이 있되 말을 못 하는 벙어리에 가깝다. 누군가가 먹여주지 않으면 생존을 이어갈 수 없고, 뭔가 불편한 것이 생겨도 단지 울음으로만 표시할 수 있는데, 그조차 누군가가 알아들어 주지 않으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내가 지치고 힘들고 피곤한 상황에도, 빽빽거리고 있는 이 아의 입장과 상황에서 생각해보면 무한한 연민이 들어 바로바로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다.


그와 동시에 나는 매번 생각해본다. 이런 신생아의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신체적 조건은 따지고 보면 생명의 끝자락에 가까운 노인들의 것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게 아닌가? 다만 차이라면, 그들은 신체적으로 크고 무거우며, 냄새가 나고, 아기처럼 귀엽지 않아 서로 나서 자주 보고 싶게 하는 매력이 없다. 또한 세상을 보는 것도 백지상태에서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꽉 찼던 종이가 조금씩 강제로 지워져 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결국 인간은 세상으로 왔던 모습에 가까운 조건으로 다시 돌아가지만 추함이라는 마지막 형벌을 받아들이고 떠난다고 할까. 인생은 원래 이렇게 슬픈 시나리오인 것인가.



아기를 키우는 것은 사실은 아기보다 내가 성장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나는 나의 부모가 걸어왔던 길이 어떤 것인지 평생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여전히 아마 완전히는 모르겠지만), 나와 인류의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도 이런 시각으로 생각해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아기들이 주역으로 살아갈 세상은 나의 부모 그리고 내가 살던 시대에 비해 분명히 더 나아져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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