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구려 보이도록 입고 다닌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외모에 크게 신경 쓰고 다닌 적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알고 보면 좋은 옷들도 꽤나 있는데 그것은 그냥 특별한 일에나 차려입기 용으로 놀리다가 별로 활용도 못하고, 정작 대부분은 편하고 싼 옷들을 가장 많이 걸쳐왔다. 비싸게 주고 산 값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옷의 감가상각 측면에서도 훨씬 합리적인 행위인데, 아이러니하게 비싼 옷은 고이 모셔두고 싼 옷은 열심히 입어댄다. 그래 봤자 어떤 옷도 해질 정도로는 못 입는데.
꾸밈에 관한 오랜 태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에서 성공한 마녀로 유명한 잡지 편집장 미란다가 열심히 머릿속만 채우기에 바빴던 기자 준비생 인턴에게 쏘아붙였듯이, "지금 걸치고 있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고고하게 난 (머리 빈 여자들처럼) 그런 세속적인 껍데기 따위 중요하지 않고 책가방 속에 더 관심 있고, 치장할 시간 있으면 머릿속에 든 것이나 더 신경 쓰는 (잘난) 사람"이라고(재수 없는) 생각을해오며 살아온 것이 바로 나였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외모나 치장하는 데 쓰는 여자들이 솔직히 한심해 보였고, 그것은 스스로 여자들이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자청해서 손해 보고 들어가는 짓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단 5분, 10분이라도 화장대에서 기본적으로 할애해야 하는 시간이면 영어든 불어든 강박적으로 꼭 외국 뉴스를 틀어놓았다. 사실 크게 신경 써서 듣지도 않으면서, 화장을 시작한 대학교 1학년 때부터의 습관 같은 것이 되었다. 화장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인풋(공수) 대비 최대한의 아웃풋(티 나는 효과가 가장 드라마틱 한)을 내는 아이라이너 하나 정도로 끝내기 일쑤였다.(.. 사실 지금도 별 차이 없다)
옷이나 가방에 대한 나의 인색함은 어쩌면 화장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사주는 옷은 어떤 것이든 불평불만 없이 입었고, 본인의 취향이나 주관이 뚜렷해지는 청소년기에도 애 셋 키우는 부모님의 빠듯한 사정을 먼저 생각해 뭘 하나 사달라고 해 본 적이 없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에는 신발 하나로 거의 구멍이 날 때까지 부모님께 얘기도 안 하고 버틴 적도 있다. 이후 내가 직접 뭘 사게 되어도 늘 최우선 기준은 가성비였고, 그러다 보니 최저가인 노 메이커 보세에서 비싸'보이는' 옷을 매의 눈으로 골라내는 엄청난 능력을 단련하게 되었다. 대기업에 들어간 후에도, 이후 연봉의 앞자리가여러번 바뀔 정도로 몸값이 올라간 후에도, 여전히 내가 고려하는 옷 구매 의향 가격대는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세일하지 않는 옷을 백화점에서 사는 그 많은 사람들은 대체 가처분소득이 얼마나 되는 걸까 궁금하다.
꾸밈의 목적
어떤 사람은 본인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 꾸미고, 어떤 사람은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이미지를 위해 꾸민다. 어떤 이는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스스로를 위해 본인이 좋아하는 톤의 옷을 입고, 어떤 이는 본인에게 어울리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컬러를 걸친다. 어떤 이는 내가 편하기 위해 고르고, 어떤 이는 전략적으로 어떤 인상을 주기 위해 고른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전자 쪽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적당히 뭘 걸쳐도 젊음만으로 빛이 나던 그때를 지나오고, 이제는 좋건 싫건 짧은 시간에 피상적인 인간관계들로부터 나를 빠르게 평가받는 시기에 도래했다는 것을 인정하자. 이제 새로 시작되는 관계들은 대부분 우정적인 맥락보다는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나이가 되었으므로, 점점 짧은 만남, 피상적인 관계에서 외양이 말해주는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외양은 내가 주는 또 다른 강력한 메시지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이 메시지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스로 센스 있는 마케터라는 설명을 하고 싶으면 온몸으로 스타일과 개성이 묻어나는 차림으로 일을 하고, 당당한 프로페셔널로 인정받고 싶으면 늘 각 잡힌 위풍당당한 컨셉을 걸치면 된다. 실제로 시중 대기업 차장과 제휴 업무 협의를 하는데, 얼룩이 가득 묻은 패딩조끼를 입은 배 나온 아재는 차림새만큼이나, 자기 밑의 똑 부러져 보이는 대리보다도 업무에서도 믿음을 주지 못했다. 당찬 어린 여자 신입 후배들이 선배 입장에서의 조언을 구할 때면, 남자들에 대비해 여자들이 딱히 규정이 없다고 스웨터 등 너무 편한 차림을 하는 것보다는, 속(셔츠)이나 겉(재킷) 둘 중에 적어도 하나는 카라가 있는 것을 입는 것이 더 프로페셔널해 보이기 위한 기본인 것 같다는 말을 해 준 적은 있지만 그게 다였다. 너무 튀어 그 자체로 오르내릴 거리가 될 필요는 없지만, 꾸준하고 정제된 특정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기여할 수는 있다.
깨달음의 실천
가끔 그럴 때가 꼭 있지 않은가. 아무도 안 만날 예정으로 그냥 수더분하게 하고 나갔더니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맞닥뜨리거나, 갑자기 뜻하지 않은 중요한 자리에 나서야 할 절호의 기회가 온다거나. 그럴 때마다 "Always Be Presentable!"이라는 말을곱씹는다. 어차피 뭔가를 입고 아침에 나오면, 엄청나게 야하거나 딱 붙는 차림만 아니라면 그 뒤로는 그 하루가 또 별반 다를 바 없이 흘러가지 않는가. 이왕이면 언제 누구와 마주치더라도 꿀리지 않을 차림을 하고 집을 나서자. 경험상 헐렁한 옷을 입으면 그날의 마음가짐이나 태도마저 알게 모르게 헐렁해지기도 쉽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뭔가 어떤 자리에서는 왠지 꿀릴 것 같은 옷, 그리고 귀여운 컨셉의 옷을 제일 먼저 정리했다. 후줄근함이 수수함으로, 귀여운 것이 발랄함으로 어필할 때는 이제 지났다는 것을 인정했으면 바로 일말의 옵션 자체를 아예 제거함으로써 삶의 효율을 높이자.
이제 한껏 비워냈으니, 이제는 미니멀하고 전략적으로 옷장을 채워가자. 옷을 살 때는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다양한 필터를 통과하고 남은 "정말 괜찮은 옷"에만 지갑을 열기로 한다.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은 1) "이 옷은 나를 빛나게 해 줄 옷인가?" 이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과감히 놓는다. 평범한 옷들은 기존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평범' 카테고리에서 +n의(개수를 늘려가는) 행위는 몹시 비경제적이며, 내가 평범한 차림의 스타일로 등장할 빈도수를 높이는 행위이다. 두 번째 질문은 2) "내 눈에 이쁜 것과는 별개로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인가?" 나도 봄만 되면 샤방샤방 꽃무늬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한껏 봄처녀 흉내를 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잘 안다, 내 누런 피부 톤에는 희미하고 조잡한 프린트의 옷이 되고 만다는 것을. 내게 어울리는 것은 보다 선명하고 뚜렷한 패턴의 단정한 스타일이다. 3) "대체할 만한 옷이 정말 없는가?" 마지막에 고르게 되는 것은 결국 나중에 보면 비슷한 것들인데, 내가 아닌 남이 얼핏 보기에 거기서 거기인 것이이미 옷장 어딘가에 있었다면 굳이 또 살 필요는 없다. 결국 잘 어울리고 스타일 좋은 알짜배기 몇 벌로 이미지를 꾸려나가는 것이 시간, 비용, 에너지 소모 측면에서 효율적이고 좋은 것 같다.
좋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적절하게, '상대방이 감응할'만 한 적절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외양보다 알맹이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외양이 알맹이를 더욱 잘 빛나게 해 줄 수 있다면 굳이 신경 안 쓸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가상의 세계에서만 살아갈 게 아니라면 우리의 실제 존재감 그 자체로 마케팅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좋게 쓰든, 나쁘게 내버려 두든 그것은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내일 아침 옷장 앞에서, 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