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육아가 틀렸음을 깨달았을 때

내가 원한 부모 vs 아이가 바라는 부모

by 뽀니



어느 날 책 한 구절이 나를 멈춰 세웠다.


'나는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가' 보다 '내 아이는 어떤 부모를 원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된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이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실은 내가 편한 방식을 택하고 있었음을.

아이의 감정보다 내 계획이 먼저였고, 아이의 속도보다 내 조급함이 앞섰다는 것을.



전업맘이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시간은 잘도 간다.

집에서 사부작사부작 일을 하다 보면 어느덧 하원 시간

꼭 그런 날이 있다. 유독 피곤하고 지치는 날


어느 그런 날, 어린이집을 하원하고 신난 아이의 손을 붙들고 난 집에 들어가기 바빴다.

아이의 마음은 묻지도 않은 채.

아이 눈에는 세상이 여전히 궁금하고, 그 하루가 끝난 것이 아쉬웠을 텐데도, 난 단지 지친 하루를 빨리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늘은 그만 놀고 들어가자."

그 말 뒤에 숨은 진심은 '엄마 이제 힘들어. 너도 좀 쉬자'는, 오로지 내 감정뿐이었다.

아이의 마음은 듣지 못한 채, 왜 빨리 따라오지 않느냐고, 벌써 몇 분 째냐고 재촉만 하는 그런 엄마였다


나의 MBTI는 P이지만 유독 육아에 있어서만은 J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내 계획대로 따라와 줬으면 좋겠고 내가 정해놓은 스케줄대로 움직여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

하지만 육아는 결코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들이 계속해서 찾아왔고, 그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지 스스로도 답답했다.

지독히도 P인 내가, 왜 하필 육아에서만은 계획적이고 통제적인 J가 되는 걸까.

그래서일까. 통제적인 J가 되어가는 나를 보며 문득, 아이들이 원하는 부모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가' 보다 '내 아이는 어떤 부모를 원하는가?'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이러이러한 부모가 되어야지.' 혹은 '이러한 아이로 키워야지'라는 생각을 많이 해왔다.


하지만 정작 '내 아이들은 어떤 부모를 원할까?'라는 물음은 나에게 던져본 적이 없다.





어렸을 적, 나의 엄마는 꽃집을 운영하셨다. 졸업식 시즌이면 늘 꽃 준비로 바쁘셨고, 그래서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내 졸업식에 단 한 번도 참석하신 적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예쁘 꽃다발을 들고 졸업식에 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있어주는 엄마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곤 했다.






아이를 키우는 지금, 문득 깨닫는다. 나도 엄마에게 바라는 모습이 분명 있었는데, 정작 엄마가 되고 나니 그 마음은 저 멀리 욱여넣어 놓았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분명 우리 엄마, 즉 나에게 바라는 마음이 있을 텐데 말이다.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옳고 그름을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 아래 나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기준을 들이밀었다.

그게 아이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내 방식이 옳다고 믿었고, 아이가 그저 따라오길 바랐다.

언제부턴가 '친구'라는 말 뒤에 숨어 권위와 통제를 감추고 놓지 못하는 부모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육아가 틀렸음을 인정했을 때, 되려 마음은 편해졌다

그동안 나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던 무게가, 묵힌 쌀가마니처럼 서서히 내려앉았다.

아이를 통제하려는 마음,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모든 것을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이 조금씩 옅어졌다.




등원 전의 루틴

아침밥을 반드시 다 먹고, 세수하고, 양치까지 끝마치고서야 유치원 버스를 타러 부랴부랴 뛰어가던 우리

"빨리 밥 먹어". "빨리 와 세수하자" "뛰어 늦었어" 매일 반복되던 말들



아침밥은 먹을 만큼만 먹고(안 먹으면 말고), 세수는 반드시 하지만 양치는 시간이 안되면 안 하기도 하고, 가그린으로 대체하기도 하니 꽤나 여유가 생겼다

"엄마 아직 시간 있어?" "엄마 책 하나 보고 가도 돼?"

이제야 아이에게 말할 시간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이것 봐, 꽃이 폈네" "여기 개미도 있어"

부랴부랴 뛰어가던 유치원 버스 타러 가는 길도 이제는 함께 꽃구경도 하고 개미도 보는 그런 시간이 되었다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가 보다, 어떤 부모를 원하는가



아이에게 사랑을 갈망하고 아이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 부모.

무릇 사람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걸 하지 않을 때 더욱 빛이 나는 존재인데, 왜 난 그 사실을 잊고서 달려왔을까


아이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내 방향만을 고수하진 않았는지.

정작 아이가 부모의 어떤 행동을 싫어하는지, 어떤 부모를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물음을 너무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부쩍 든다.


이 고해성사 같은 기록이 조금은 나를 바꿔놓지 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