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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Oct 01. 2021

38년, 39년

2018.10.30

2014년 10월, 뉴욕 유엔 본부에서.


38년. 5.18 생존자 중에는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끔찍한 참상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살아가야 했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공식적으로 기록되고 확인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철저히 조사되기를 바란다. 헬기 기총소사의 객관적 증거도 2016년이 되어서야 발표된 것을 보면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도 있을 것이다. 기억하기 불편하고 부끄러운 일일수록 더욱 명확하게 기억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을 보며 군사분계선 이북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79년에 국제사면위원회가 발표한 베네수엘라 출신 시인 알리 라메다(Ali Lameda)의 증언으로 수용소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지 39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후의 수많은 증언과 위성사진 분석으로 수용소의 존재는 확실히 입증되었다.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고, 최근에는 위성사진에 수감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포착되었다. 고사총으로 사람들을 처형하는 장면도 위성사진에 잡혔다. 이러한 일들을 온전히 기억하고 기록하는 데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인가.


올해도 유엔 총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을 둘러싼 외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지만, 이 과정조차도 나중에 뒤돌아보면 전초전으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궁극적인 목표는 진상 규명과 책임 규명이다. 비단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고, 특히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의 최종 보고서가 발표된 후부터는 국제사회의 대체적인 인식이 그렇다. “Never again”을 순수한 절박함으로 외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1941년에 부모를 따라 라트비아에서 미국으로 피난을 온 정치철학자 주디스 슈클라(Shklar)는 1989년에 “Liberalism of Fear”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인류가 지향해야 할 최상의 가치(summum bonum)가 무엇인지는 제시하지 않지만, 반드시 막아야 할 최악의 행위(summum malum)는 무엇인지 분명하게 얘기한다. 그 summum malum은 바로 “잔혹함과 이에 대한 공포, 그리고 공포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잔혹함은 “강자가 어떠한 유형 혹은 무형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약자에게 물리적, 심리적 고통을 고의로 가하는 것”이다.


절차나 수단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방향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막스 베버는 국가를 “어떠한 물리적 영역(영토) 내에서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주체”로 정의했다. 국가라는 강제력과 권력이 약자에게 고통을 가해서는 안 된다. 그럴 수 없도록, 그러지 않도록, 혹은 다시 그러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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